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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an 22. 2022

하얀 세상. 행복한 아침음악을 들으며,



이른 아침 기대 없이 클릭하고 들었다. 평온했다. 행복해지는 음악이라고 명명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마치 행복해지는 연습처럼 들었다. 내 안에 있던 어떤 고요함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미 거기 살고 있던 마음 하나  달그락거리면 왠지 살살 간지럽다. 이 마음을 꺼내 주고 이름 지으면 행복이 되는 일은 마법 같다. 행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말, 이처럼 스스로를 명명하고 증명하는 방식은 저마다의 사정을 알고 같이 살아낸다. 행복이 하는 일 같다. 참 무엇보다 그림에 빠졌다. 하얀 겨울 눈보라 사이 소복한 나무들, 존재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대함이었다.


나라고 말할 것이 없다. 나를 둘러싼 시간이 쌓일수록 그렇다.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몸짓 등등 나를 규정하는 의식을 명명한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나의 시선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는 그 모든 몸짓은 상징처럼 앞다투어 뭔가 드러내는 것과 연결시킨다. 나에게 이름 붙이는 이유를 알면 참 다행인데 나를 이해하는 방식이 때때로 불완전하다. 그래서 의미를 붙이는 일은 함부로 짓지 못한다. 붙여야 할 것과 미뤄두어야 하는 것들, 내가 부여한 의미가 부서져 다시 돌려세워야 할 말들, 또 어떤 이유를 달고 사라진 의미는 변명처럼 우호적이지만 미온적이다. 그래서 말과 행동은 자주 불일치를 경험한 이의 진심을 왜곡하기도 한다. 고정된 것 없이 쉼 없이 흐를 뿐이다. 그 사이 나의 시간들이 편승할 뿐이다.


찰나의 삶이란 온전할 수 없는 나의 심장처럼 시시때때로 흔들리고 달아오른다. 두근거림이 두려움이 될 때도 있어서 그 뜨거움이 담긴 사연은 늘 삶의 어느 언저리를 더듬기 마련이니까,


요즘 내가 어떤지는 내게 물어봐야 하는데 다른 이에게 물어본다. 내 옷이 어떤지 내 말이 어떤지 우리를 점검하게 하는 말들은 점점 혼란스럽다. 갈피 없이 타자의 시선에 타자의 평가에 관대한 자신마저 소멸되기 십상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데 그땐 걸린다. 분명 의도 없이 떠난 말들이 유턴할 수 없다. 이미 일방적인 소통에서 옆길은 없다. 오로지 속력이 붙으면 왠지 으쓱하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자신의 당당함이 한순간 그 자리를 모면할 것 같은 심증처럼 안도한다. 외면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시간은 한참 뒤에 찾아온다. 또다시 점검의 시간이다. 무슨 생각도 괜히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적 성격만 아니면 되는데 가끔은 속절없이 숨기도 한다.


산다는 건 모든 총량을 덜어내기도 전에 희미해진 의미, 더해진 무게를 빼는 의미를 조금 알듯한 그 틈새에서 자청한 침묵으로 흐르는 것 같다. 다행이다, 내가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이 잃어버려도 되는 거면 그냥 놓아주자. 조금 덜어내고 비워내고 조금씩 가벼워지면 사소하고 작은 삶이 흐르고 마음이 흐르면 다시 심장이 뛸 거니까. 서로 아끼는 것들끼리 살아내는 시간이 흐르면 오직! 행복!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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