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이었지 싶다. 꽃송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빛나는 란타나를 집으로 들인 날을 기억한다. 여전히 2021년인 듯 2022년을 살아가고 있는 요즘, 시간의 경계가 애매한 면이 없지 않다. 양력과 음력 절기 상의 아직은 2021년이라고 하면 그냥 그렇다. 덕분에 해마다 두 번의 새해를 맞이하고 두 번의 새 마음이 되어준다. 그래서 내겐 날마다 새날의 기쁨을 좀 더 담백하게 지정한 시작이 있다.
작년 여름 내내 무성한 잎을 보여 주었다. 꽃의 빛깔은 농도 짙은 색으로 진하거나 연해 지기를 반복했다. 무수히 흩어진 꽃잎들이 나무 주위에서 흩날려도 그냥 두었다. 아름다운 추락은 비행하지 않아도 그대로 보금자리처럼 안락했다. 그러다 꽃잎을 쓸어 담으면 또 다른 꽃을 보여주었다. 간간이 축 늘어진 가지들을 잘라 주었다. 소심하게 아주 작게 건드리고는 혹시나 수형을 망칠까 걱정했다. 내 마음을 아는 듯 별 탈 없이 자라주었다. 휘어지게 길게 자라면 또 조금씩 자르곤 했다. 그러다 조금씩 타이밍 맞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조금 자르는 게 아니었다. 과감하게 가지 끝까지 삭둑 잘라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땐 이미 나무 사이로 구멍이 크게 나 있을 때였다. 대략 난감했다. 가지 간격이 제멋대로 길었다가 어느 마디에만 잎이 열렸다. 가지 끝으로 달린 꽃송이가 무거워 흔들리도록 둔 셈이었다. 기특하게도 그 상태에서 잎들은 계속 길게 뻗어나가 주었다. 그저 고마웠고 미안했다. 그럴수록 예쁘게 수형을 잡아주지 못한 마음이 다시 자르기를 다짐하는 시간으로 흘렀다.
며칠 전 란타나 나무의 가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 가지 두 가지 자를 때마다 얼마나 아까운지 조심스러웠다. 가지치기는 과감해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잘라야 할 때를 알아서 단호해야 하는데 늘 머뭇거린다. 그리고 망설였다. 시기가 적당한지 새로운 잎들이 돋아날지 오히려 나무의 가지가 잘린 체 그들의 순리를 저버리는 건 아닌지 고민이 들었다. 나무 앞으로 서성이다 돌아서면 다시 또 그 자리에서 서성이다 가위를 들었다. 떨렸다. 어떻게 잘라줘야 하는지 어떻게 해 주면 나무가 덜 아플지 염려되었다.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살아서 잎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기에 그 시간을 자르기란 용기가 필요했다. 정말 삭둑 잘라 주었다. 자르면서 또 잘랐다. 나뭇가지가 잘린 바닥을 쓸어 담을 때 또 한 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애써 나무 가지들을 다듬어 주었다고 했다. 이제는 기다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생각해 본다. 그 사이가 너무 멀면 소원해진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우면 솔갑다. 적당히 포옹하고 적당히 사이를 두자. 그리고 과감히 자를 때는 가슴에 새 잎이 돋아나도록 자르자. 솔솔바람이 들고 해가 들면 새 잎이 조금씩 자라 예쁜 수형으로 잘 자리 잡도록 그렇게 기다리자. 넘길 수 없는 시간을 뒤로하고 가슴마다 구멍 뚫린 동그라미가 잎들로 메워지듯 그 사이에 바람이 통하기를 기다리자. 용기 있는 시간은 조금 뒤에 와도 서로 앞서지 않아도 되니까. 괜찮다.
오늘은 아침부터 흐리다. 흐려도 태양은 저기 있으니까. 또 괜찮다. 잎 사라져 단순한 나무 앞으로 나는 또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