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음의 역설
부처님의 지혜를 담은 고전 <반야심경>에는 ‘비어 있음(空)’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불교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비워라.”, “흘러가는 대로 놔둬라.”와 같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반야심경>을 해석한 유명한 책, 틱낫한 스님의 <최상의 행복에 이르는 지혜>를 읽고 나서 ‘비어 있음’의 참뜻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비어 있음’은 물 한 방울조차 없는 빈컵과 같이 ‘텅 빈’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사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꽉 찬’ 상태에 가깝다. 비어 있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 그 자체로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과 관련된 수많은 요소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종이를 단순히 글자를 담아내는 도구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종이의 주원료인 나무가 베어지는 과정,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인력과 생산 설비 등 종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상황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비어 있음’을 적용한 사례이다.
우리가 ‘비어 있음’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이는 자기계발을 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자기계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 호르몬의 작용, 그리고 공기나 영양소 등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까지 '나'를 둘러싼 것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만 비로소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 또한 자기계발에서 중요한 요소다. 보통 나와 성격이 안 맞는 사람을 보며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은 사실상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동치이다. 자신 또는 사회가 정한 고정된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려는 것과 같다. MBTI만으로 상대를 100%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아야, 상대와 관련된 여러 상황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상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비어 있음’을 실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의지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나 혼자만 실천한다고 해서 세상이 원하는 대로 돌아갈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내가 굳게 믿어 왔던 것들이 틀릴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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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 사진: Unsplash의Lahiru Supunchand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