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구 Jan 30. 2024

우리는 이미, 그렇고 그런 풀꽃이다

인내라는 거울

자세히 보아야 멋있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것들이 있다. 오글거리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위 문장에 대해 나태주 시인이라면 아마도 "너도 그렇다." 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한 풀꽃 한 송이가 여기에 있다. 




#1. 변수

사진: Unsplash의 Vlad Bagacian


원래 계획이었으면 1월 둘째 주에 혼자서 3주 동안 태국 치앙마이를 다녀올 예정이었다. 2023년 11월 30일에 회사를 그만둔 후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비행기표는 한 달 전, 그러니까 12월 중순에 예약했다.


평소 여행 계획을 짤 때, 여행 계획에 차질을 주는 변수가 최대한 없는 날짜를 선택하는 편이다. 3주 동안은 여행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을 거라 95% 확신하고 호기롭게 항공권을 구매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비행기표를 끊은 지 5일 만에 여행을 취소했다.


#2. 만남

사진: Unsplash의 DocuSign


항공권 발권을 마치고 3일 지났을 때, 지인으로부터 개인 카톡이 왔다. “혹시,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다음 어떤 질문이 이어질지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연애 중이신가요?”

“아니요.”

”그럼 혹시 소개팅 받으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이어진 내 대답은 늘 그래 왔듯 ’네‘ 였다. 평소였다면 소개팅 성사 후 제일 먼저 언제 어디서 만날지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소개팅 첫 만남이 잘 이루어질 경우를 대비해 예정된 여행을 취소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소개팅 첫 만남은 여행 일정과 겹치지 않았다. 다만 99% 확률로 겹치는 것은, 소개팅 상대와 잘 맞았을 때 성사될 애프터(두 번째 만남)였다. 애프터는 여행이 끝나고 잡을 수 있지만 가급적이면 첫 만남 이후 빨리 갖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결국 소개팅 제안을 받은 지 3일째에 항공편을 취소하기로 했다. 여행보다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치앙마이는 내년에라도 갈 수 있지만 소개팅은 좀처럼 갖기 힘든 기회이기 때문에 기회비용적인 측면에서 여행을 안 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소개팅 첫 만남을 가지고 나서 이 거래가 썩 합리적이진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3. 신속한 마무리

사진: Unsplash의 Jan Tinneberg

사실 소개팅을 하기 전, 지인이 보내준 사진을 통해 어렴풋이 본 상대의 외모나 카톡하는 방식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별로라거나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개팅을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만나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지혜라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다행히 여행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소개팅을 나갔다는 보상심리 때문인지, 아니면 새해에 복을 받은 건지, 1월 첫째 주 금요일 발산역에서 처음으로 만난 소개팅 상대의 인상과 말투는 예상과 달리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 장소에서 3시간 넘게 머물며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상대는 자기 얘기를 하느라, 나는 상대의 얘기를 들어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헤어진 다음 날 카톡으로 서너 마디 주고받다가 연락이 갑자기 끊겨 버렸다. 애프터는커녕 좋은 인연을 만나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틀째 답장이 없어서 상대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했다. 그런데 일주일 지나도 묵묵부답이라 소개팅 주선자에게 황당한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소개팅 첫 만남 다음 날에 소개팅 상대와 주선자가 만났는데, 상대는 내가 괜찮았지만 자기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상대가 어떤 부분에서 나와 안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했지만, 구차하게 알아내고 싶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상대는 나를 이성으로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이니, 주선자에게는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소개팅을 마무리지었다.



#4. 인내심

사진: Unsplash의 Jakob Owens


이번 만남을 포함해 여러 번의 소개팅을 경험하면서 아쉬운 부분이 하나 있다면, 나’라는 존재가 한두 번의 만남으로 타인에게 ‘자신과 안 맞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훌륭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콘텐츠에 묻혀 주목받지 못한 SNS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러한 ‘빠른 손절’, ‘빠른 판단’과 같은 직관적 사고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다는 것은 안다. 게다가 요즘에는 각종 SNS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조언하는 콘텐츠들이 범람하면수 일명 ‘쎄한 사람’을 걸러내는 보편적인 기준이 생긴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기준이 만들어지는 게 통계적으로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의 뇌가 있다. 소개팅이나 면접같이 드물게 찾아오는 만남의 기회에서 한두 번의 만남으로 상대를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귀인을 만날 기회를 놓치는 일이다. 사골 국물도 오랜 시간 끓여 봐야 그 깊은맛이 우러나듯이, ‘인내심’은 그저 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우리 모두에겐 직관의 창에 맞서는 이성의 방패가 있다. 그리고 창을 물리친 그 방패는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끔 하는, '인내'라는 이름의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들여다 보자.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는 이미 멋있고 사랑스러운 풀꽃이 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 커버 사진: Unsplash의 Sergey Shmidt



                    

작가의 이전글 외모가 곧 경쟁력인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