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자의 벽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경험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하는 단어가 바로 '통곡의 벽'이다. 벽을 넘는 과정이 이름 그대로 '눈물 나게' 힘들기 때문이다. 주로 축구에서 공격을 철저히 막아내는 수비수에게 '통곡의 벽'이라는 별명을 붙인다. 국가대표 수비수 김민재 선수가 대표적인 예이다.
통곡의 벽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적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벽 앞에서 통곡한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 벽은 지어진 지 약 3,000년이 되었다.
3,000년이 지난 지금, 내 앞엔 '3,000자 글쓰기'라는 통곡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글'은 개인적으로 쓰는 글이 아닌, 광고주의 자본이 투입된 글을 의미한다. 우리 회사는모 금융사로부터 광고를 의뢰받아 금융, 경제, 부동산, 트렌드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칼럼을 쓰고 있다.
3,000자짜리 칼럼 하나를 쓰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어떤 주제로 쓸 것인지 정한다. 일반적으로 조회수가 높은 키워드인 MZ세대, 부동산, 투자 등을 소재로 고른다. 선택한 키워드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을 소주제로 잡는다. 이렇게 설정한 소주제를 연결하면 비로소 글의 주제가 완성된다.
'공매도 전면금지'라는 소재로 글을 쓴다고 가정하자. (실제로 썼던 주제는 아니다.) 해당 키워드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은 아마도 '공매도의 뜻', '공매도의 역할', '공매도 전면금지 배경', 그리고 '공매도 금지로 인한 주식 시장 변동'일 것이다. 이 4가지 소주제를 결합하면 '공매도 전면금지의 배경과 주식 시장의 변동'이라는 주제가 나온다.
주제를 정했으면 관련된 자료를 인터넷에서 빠르게 찾아서 훑어본다. 금융사에서 발행하는 콘텐츠다 보니 각종 신문 기사와 칼럼등을 참고하여 객관성과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자료 조사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서론-본론-결론 형식을 갖춘 글쓰기를 시작한다. 내 역할은 초안을 쓰는 것까지다. 나머지 퇴고와 최종 확인은 사수의 몫이다.
칼럼 하나를 쓰는 데 보통 한나절 정도 걸린다. 자료 조사만으로도 2~3시간 소요된다. 어려운 주제의 경우 1~2시간 더 걸릴 수 있다.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초안을 쓰는 시간도 만만치않게 든다. 이곳저곳에서 찾은 자료를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1~2시간 정도 걸린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까? 경제, 트렌드 분야이니만큼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뇌피셜로 쓰는 글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쓰는 글이기에 모르면 쓸 수 없다. 그래서 업무 시간 외에도 해당 주제에 대해 공부해야 할 때가 있다. 지하철에서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뉴스 기사를 보거나,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대형서점에서 주제와 관련된 책을 훑어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팩트체크(사실 확인) 때문이다. 팩트체크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돈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만큼 독자는 숫자 하나라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잘못된 수치로 인해 이슈가 생기면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줄뿐더러 우리 회사 역시 광고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 잘못된 숫자 하나라도 허투루 넘어가선 안된다. 특히 집값, 물가, 환율 관련 정보는 시시각각 변하기에 여러 번 봐야 한다.
고된 과정을 거쳐 3,000자를 쓰고 나면 남는 것은 우울함, 무기력함이다. 때론 바보가 된 기분이 든다.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완성도가 100%에 가까운 글을 쓴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수에게 초안을 넘기면 한 번에 통과한 적이 없었다.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겠다.', '팩트 체크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글 내용에 관한 피드백은 괜찮다. 하지만 '글 쓰는 시간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실제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한 건 아니다)는 등 시간의 가치를 무력하게 만드는 피드백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글쓰기에 투자한 시간에 비해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지 않아 자신감이 곤두박질쳤다.
고백하자면 회사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는 생각이 몇 번 들기도 했다. 그 이유의 80%는 3,000자 칼럼 때문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울적한 감정에 휩싸여 침대에 누워버리곤 했다. 칼럼은 내게 아무리 써도 늘지 않는 '통곡의 벽'이었다.
그런데 영원히 넘지 못할 것만 같던 통곡의 벽에 점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