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자의 벽
(지난 이야기)
한 번쯤은 인정받고 싶었던, 특히 회사 사수에게 일로써 인정받고 싶었던 내 앞에 '3,000자 글쓰기'라는 통곡의 벽이 놓였다. 하루 반나절 이상을 꼬박 써 가며 광고주인 금융사 SNS에 올릴 칼럼(초안)을 쓴 지 반년이 넘었지만, 사수도 나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내서 무기력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단단해보이던 그 벽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일주일 전, 나는 미래에 유망한 'A 산업의 발전 과정 및 전망'을 주제로 한 3,000자 칼럼 초안을 썼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 사수는 이번 주제가 최근에 쓴 것들보다 어려울 거라 말했다. 과학기술 관련 용어가 많이 나오고, A 산업의 발전 과정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수는 평소보다 글쓰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먼저 자료 조사를 충분히 하는 게 좋을 거라 얘기했다. 나 역시 이번 주제가 어렵다는 걸 인정했다. 사실은 별거 아닌데 스스로 어렵다고 세뇌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필요한 자료도 검색하는 대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일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라고 스스로 의심했으나, 워드에 대충 휘갈긴 소제목과 참고 자료를 쓱 훑어보기만 해도 전체적인 흐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수에게 당장 초안을 넘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으로 보낸 초안을 읽은 사수의 답변은 놀라웠다.
"이번 주제 안 어려웠어요?"
"지금까지 쓴 초안 중에서 흐름이 가장 깔끔했어요.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글 같았어요."
이 정도로 칭찬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더 놀라운 건 특이 사항 없이 초안이 바로 통과된 것이다. 칭찬을 9가지 받아도 수정 사항 1가지 정도는 나올 줄 알았다. 그리고 이어진 사수의 질문.
"이런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혹시 나중에라도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이번 글에 좀더 신경을 썼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주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는 만큼 사수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평소보다 자료 조사하는 데 2시간 더 걸렸지만, 초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료 정리와 목차 구성에 열을 올렸다.
마침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는 데 효과적인 시스템을 줄곧 사용해왔는데, 이름하여 '노션(Notion)'. 흩어져 있는 자료를 보기 좋게 정리하고 목차를 쉽게 구성할 수 있는 메모 도구다.
노션을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초안의 흐름을 잡았다. (예시)
[구성]
> A 산업의 발전이 정체된 이유
- 외부 요인
- 고금리 장기화(참고자료)
- 전쟁으로 인한 국제 정세 불안
- 내부 요인
- 국내 인프라 부족(참고자료)
[자료 DB] (아래에는 간단히 항목만 표기)
기사 제목 / 위치 / 요약 /
1. 기준금리 인상 / 본문 2 / 고금리 기조 장기화
2. .....
'엔터키'와 '스페이스키'만 눌러도 생각에 꼬리를 무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조사한 자료 중 글의 흐름에 맞는 부분만 쏙 빼서 집어넣으면 초안이 완성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문단을 하나하나 완성해가는 것보다 이렇게 흐름을 먼저 잡고 살을 붙이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아래에 표를 넣으면 필요한 자료를 쉽게 꺼내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A 산업의 정체 이유'에 대해 본론에서 설명할 때 '외부 요인', '내부 요인' 두 개의 문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첫 문단에서 언급한 고금리 장기화에 대한 내용을 두 번째 문단에서 굳이 또 언급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흐름을 안 잡고 가면 금리 얘기를 하다가 국내 인프라 얘기를 하는 등 내용이 섞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쨌든 내 변화의 비결을 궁금해하는 사수에게, '노션을 활용하니 글의 흐름 잡기가 편해졌다'는 다소 오만한 답변을 했다. 그러면서 정보 전달용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고 '노션을 활용한 글쓰기 비법'을 주제로 누군가에게 강의를 하고 싶다는 상상도 해봤다. '3,000자 칼럼'이라는 벽을 드디어 무너뜨렸다는 생각에 기고만장해졌다.
하지만 '역시나 벽은 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초안을 쓴 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통곡의 벽에 난 자그만 균열은 마치 방탄유리에 난 망치자국과 같았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