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자의 벽
지난 이야기)
최근 주목받는 미래 산업 분야인 A를 소개하는 3,000자짜리 칼럼을 초안을 썼다. 회사 사수로부터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글의 흐름이 몰라보게 깔끔해졌다. 비결이 뭐냐?' 라며 칭찬을 받았다. '노션(메모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글의 흐름 잡기가 편해졌다'라고 카톡을 보냈다.
답장을 보내고 나니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감격스럽고 기뻐하고 기록해야 할 그날,
내가 가장 원했던 것은
(손) 흥민이가 그것을 잊는 것이었다.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손웅정)에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는 독일 프로 축구(분데스리가) 데뷔 무대에서 멋진 골을 터뜨린 아들이 기쁨의 순간을 잊길 바랐다고 한다. 순간의 우쭐함이 스스로를 망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나 역시 사수에게 칭찬받았던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실력이 아닌 운이 좋아서 글을 잘 쓴 것이라면 실망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A 산업과 함께 떠오르는 미래 산업인 B 분야에 대한 글을 쓸 차례였다. 이번에도 노션을 사용해서 글의 윤곽을 잡았다. 그러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조사한 자료에서 어떤 정보를 끄집어낼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B 산업은 인공지능(AI)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AI 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 설명이 필요했다. 게다가 A 산업에 비해 낯선 용어가 많이 나왔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니 글이 길어지고, 어려운 용어를 빼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사수에게 도움을 구했다. 사수는 낯선 용어는 최대한 쉽게 풀어쓰는 게 좋다며, 다른 블로그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어려운 용어를 다 설명하진 못해도, 글의 흐름상 꼭 필요하다면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자에게 딱딱한 주제를 얼마나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다. 글쓰기 실력이 늘었다고 착각했던 건, B에 비해 A가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시간이 덜 걸렸기 때문이다.
통곡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좌절감이나 분노 따윈 없었다. 오히려 '운 좋게' 글을 잘 썼다는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실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주제에는 노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내용을 신속하게 기획하는 데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연구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3,000자 통곡의 벽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운 좋게 한 번 벽에 흠집을 냈다고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퇴사를 한 상태라 더 이상의 벽을 넘으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벽을 넘으려고 시도해 왔기에, 비슷한 상황을 마주친다면 지금보다 훨씬 벽을 넘기 쉬울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