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구 Dec 04. 2023

통곡의 벽(下)

3,000자의 벽

지난 이야기)

최근 주목받는 미래 산업 분야인 A를 소개하는 3,000자짜리 칼럼을 초안을 썼다. 회사 사수로부터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글의 흐름이 몰라보게 깔끔해졌다. 비결이 뭐냐?' 라며 칭찬을 받았다. '노션(메모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글의 흐름 잡기가 편해졌다'라고 카톡을 보냈다.



답장을 보내고 나니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감격스럽고 기뻐하고 기록해야 할 그날,
내가 가장 원했던 것은
(손) 흥민이가 그것을 잊는 것이었다.

-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손웅정)에서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는 독일 프로 축구(분데스리가) 데뷔 무대에서 멋진 골을 터뜨린 아들이 기쁨의 순간을 잊길 바랐다고 한다. 순간의 우쭐함이 스스로를 망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나 역시 사수에게 칭찬받았던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실력이 아닌 운이 좋아서 글을 잘 쓴 것이라면 실망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A 산업과 함께 떠오르는 미래 산업인 B 분야에 대한 글을 쓸 차례였다. 이번에도 노션을 사용해서 글의 윤곽을 잡았다. 그러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조사한 자료에서 어떤 정보를 끄집어낼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B 산업은 인공지능(AI)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AI 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 설명이 필요했다. 게다가 A 산업에 비해 낯선 용어가  많이 나왔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니 글이 길어지고, 어려운 용어를 빼면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사수에게 도움을 구했다. 사수는 낯선 용어는 최대한 쉽게 풀어쓰는 게 좋다며, 다른 블로그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어려운 용어를 다 설명하진 못해도, 글의 흐름상 꼭 필요하다면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자에게 딱딱한 주제를 얼마나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었다. 글쓰기 실력이 늘었다고 착각했던 건, B에 비해 A가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는 시간이 덜 걸렸기 때문이다.




통곡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좌절감이나 분노 따윈 없었다. 오히려 '운 좋게' 글을 잘 썼다는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실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주제에는 노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내용을 신속하게 기획하는 데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연구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3,000자 통곡의 벽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운 좋게 한 번 벽에 흠집을 냈다고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퇴사를 한 상태라 더 이상의 벽을 넘으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벽을 넘으려고 시도해 왔기에, 비슷한 상황을 마주친다면 지금보다 훨씬 벽을 넘기 쉬울 거라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통곡의 벽(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