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1시간이 주어진다면?
제목 그대로, 강남 가는 길에 쓰는 글이다.
내가 사는 곳은 일산 대화동. 오금역과 더불어 3호선 종점인 대화역이 있는 곳이다. 강남역까진 지하철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그니까 한번 왔다 갔다 하면 족히 3~4 시간은 걸린다.
그럼에도 약속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일산보다는 강남을 선호하는 편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집 밖으로 나갈 거면 이왕이면 강남까지 가는 편'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지하철이다. 지하철 안에서 보내는 1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화역은 3호선 종점이라서 앉아서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럼 지하철에서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지하철을 먼저 타야겠다.
10시 15분 대화역
사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다. 대부분은 유튜브나 인스타를 볼 것이다. 이것도 나름.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매일 챙겨보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면 지하철에서 몰아보는 게 나을 수 있다.
요즘에는 책 읽는 문화가 발달해서 그런지 종이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스마트폰보단 눈이 덜 피로한 활동이다. 책을 받칠 만한 곳이 마땅히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나는 지하철에서 유튜브나 종이책을 잘 보지 않는다. 유튜브의 경우에는 와이파이 문제로, 종이책의 경우에는 종이책을 깜빡하고 집에 놔두는 일이 잦아서.
10시 27분 백석역
이전 회사가 있던 곳이라 익숙해서인지 하마터면 내릴뻔했다. 회사 다닐 때만 해도 출퇴근할 때 전자책을 주로 읽었다. 종이책보다 메모하기가 더 편해서다. 전자책에서 하이라이트 기능을 이용하면 표시해 준 부분만 나중에 따로 꺼내 볼 수 있고, 스마트폰 메모 앱에 복사하여 저장해 둘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올해 서울에서 여러 독서 모임을 해 왔는데, 책 대부분은 지하철에서 읽었다. 때론 모임에서 다룰 주제를 발제문으로 공유하기도 하는데, 모임 가는 지하철에서 발제문을 읽으면 시간제한 때문인지 집중이 잘 된다.
10시 36분 원당역
슬슬 일산을 벗어나 서울로 들어가는 중이다. 이 구간부터 어려움이 시작된다. 일단 승객이 점점 많아진다. 열기와 더불어 말소리도 점점 커진다. 반대편에 앉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난관은 잡상인들이다. 3호선은 유독 어르신들이 많이 이용하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이 종종 있다. 적막을 깨고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물론 이중에는 사정이 딱한 분들이 있다. '다리를 다쳐 장사를 할 수 없다. 도와달라.'는 문구를 A5사이즈 종이에 일일이 적어서 승객들에게 보여준다. 한편으론 두 다리 멀쩡한 채로 글이나 쓰고 앉아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10시 50분 구파발역
드디어 서울로 들어왔다. 대화역에서 35분 걸렸는데, 글을 쓰고 나서야 이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았다. 글을 쓰다 보면 그냥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 보게 되어 좋은 거 같다. 충분히 많이 쓴 거 같은데 30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구나.
10시 58분 불광역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는데, 지하철에서 보내는 1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얘기하는 중이었다.
사실 30분 넘게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 글자가 잘 안 들어오기 시작한다. 강남 가는 여정을 쓰고 있지만, 갑자기 내리고 싶은 충동이 살짝 들었다. 6호선으로 갈아타 합정 또는 홍대로 갈까도 생각해봤다. 원래 목표는 강남까지 갈 예정이었으니, 쓸 만큼 썼기에 여기서 글을 마무리해도 좋겠다는 간사함 때문이다.
11시 07분 경복궁
어느새 서울 중심부까지 와버렸다. 종로에서 강남까지는 정거장 수에 비해 역 간 거리가 짧았던 걸로 기억한다. 순식간에 2~3 정거장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에 글쓰기를 슬슬 마무리해야겠다.
11시 30분 신사역
드디어 강남에 도착했다. 강남까지 가는 지하철에서 보내는 1시간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어봤는데 글 한편을 완성해버렸다. 이번에 어떤 주제를 써야 할지 며칠 동안 고민했다. 그런데 1시간 안에 글을 완성해서 허무하다.
어쩌면 지하철에서 버려지는 시간을 잘 쓰는 게 의외로 인생을 가성비 있게 사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