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국밥 '정짓간'ㆍ칼국수 '초량해칼국수'
2022년 여름 부산을 부산하게 오갔던 적이 있다. 제주에 머물다가 서울로 가려는 날 지인이 부산에서 ‘벙개’를 쳐서 행선지를 바꿨다. 미식을 즐기는 지인과 함께 반나절 동안 곰장어, 돼지국밥 등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폭풍 흡입하고 상경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 날 짐을 채 풀기도 전에 서울서 부산을 여행 간 또 다른 지인이 휴대전화 액정이 완전히 깨졌다고 ‘SOS’를 쳐서 다시 부산행 열차를 탔다. 휴대전화를 열어 볼 수 없으니 일상이 정지된 것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힌다’고 이때는 내려간 김에 며칠 머물면서 부산의 전통시장과 뒷골목을 누볐다. 맛집을 찾아 두루 다녔던 기억이 이제는 추억으로 남는다.
지난달 하순 짧은 1박2일 여정으로 부산행 열차를 타니 부산스럽던 2022년 부산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부산역에 내려 ‘이바구길’을 걸었다. 이바구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란 뜻이다. 부산 근현대역사가 켜켜이 쌓인 동구 지역에는 다양한 이바구길이 있다.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부터 피란민들의 설움이 층층이 밴 가파른 ‘168계단’을 걷는 초량이바구길이 대표적이다. 영화 한 편으로 울고 웃게 했던 ‘범일동극장트리오’, 가냘픈 어깨로 부산의 경제를 지탱했던 신발공장 여공들의 발길이 오가던 ‘누나의 길’까지 이바구길은 근현대 부산의 옛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동시에 민초들의 억척스러운 삶과 역동적인 세월이 깊이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초량이바구길은 남선창고 터와 구 백제병원에서부터 시작한다. 남선창고는 1900년대 함경도에서 싣고 온 물건을 보관하던 최초의 물류창고다. 명태를 주로 보관해서 일명 명태고방으로도 불렀다. 현재는 붉은 적벽돌 담장만 남겨 창고 터였음을 알리고 있다. 서울 옥인동 인왕산 자락에 있다가 철거된 옥인시범아파트도 벽 한 켠을 남겼다. 이 같은 흔적은 역사성과 장소성을 알려주는 좋은 도시개발 사례로 평가하고 싶다.
백제병원은 1927년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으로 개원했다. 모체는 1921년 개업한 백제의원이다. 당시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지역의 중요한 의료기관이었다. 이 건물은 처음엔 벽돌조 4층 규모로 건립했다. 같은 해 12월 인접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벽돌조 건물을 지어 이어 붙였다. 1972년 화재로 일부 건물이 소실됐지만 현재 지하 1층, 지상 4층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32년 의료사고 등으로 병원 폐원 후 건물은 중국음식점, 일본군 장교숙소, 치안대사무소, 중화민국 영사관, 신세계예식장 등으로 사용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두동이 하나로 합쳐진 건물로 내부 평면이 사각형, 마름모꼴 형태의 다양한 방들로 구성돼 있다. 1, 2, 3층에는 목조계단과 장식, 디테일 등 목재로 마감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현재 1층에는 구 백제병원의 내‧외부 건물구조와 흔적을 그대로 보존한 ‘브라운핸즈’란 카페가 성업 중이다. 1920년대의 공간 속에서 은은한 커피를 즐기는 맛도 나름 낭만적이다. 3층은 ‘갤러리 이비나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2층에 있던 창비 부산은 지난해 말 폐점해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을 줬다. 출판시장 침체 여파로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웠던 것이다. 창비부산이 빠져나간 공간은 비어 있었고 역설적이게도 건축물 내부 원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모쪼록 빨리 새로운 문화공간을 채워지길 기대한다. 구 백제병원만 자세히 본 것만으로도 부산 여행은 이미 꽉 찬 느낌이다.
담장갤러리와 동구 인물사담장을 지나 168계단으로 향한다. 동구 인물사담장은 초량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동구를 대표하는 과거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나훈아. 초량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나훈아거리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초량의 가파른 언덕을 따라 오르면 이름 그대로 16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168계단이 나온다. 깎아지르는 듯한 가파른 계단은 산복도로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거친 숨을 내쉬며 꼭대기에 도착하면 부산항과 원도심이 한눈에 펼쳐진다.
과거에는 산복도로 주민들이 오르내리던 삶의 길이었고 지금은 부산 원도심의 독특한 경관과 김민부 전망대, 168 더 데크, 계단을 따라 입주한 다양한 지역 청년기업체를 만날 수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가 됐다. 특히 계단을 따라 설치된 초량168계단 하늘길(경사형 엘리베이터)은 초량이바구길의 새로운 명물이다. 명란브랜드연구소에 들러 몇 가지 기념품 굿즈를 사고 차이나타운 쪽으로 내려왔다.
점심 식사는 구 백제병원 맞은편 ‘정짓간’ 부산역점에서 해결했다. 정짓간은 부엌의 경상도 사투리다. 사하구 신평동에서 2011년 문을 연 정짓간은 부산식 돼지국밥 전문점이다. 한자로는 정취간(情炊間)을 차용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따뜻한 마음이란 의미의 情(뜻 정),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정성껏 밥을 짓는 炊(밥 지을 취), 그 정성과 시간이 머무는 자리란 뜻의 間(공간)이라고 해설한다. 한마디로 정으로 짓는 따뜻한 부엌이란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정짓간은 단순한 국밥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그릇의 밥에 따뜻한 마음을 담고, 다정한 말 한마디를 곁들여 정직한 재료로 만든 국밥을 그리운 기억처럼 대접합니다. 솥에서 우러난 깊은 국물처럼 시간과 손길이 켜켜이 쌓인 맛. 속을 달래고 마음을 눌러주는 그런 한 그릇을 내어놓습니다.”
정짓간이 내놓은 식당 경영 철학이다. 국밥에 들어가는 육수는 매일 직접 끓여 준비한다. 농후한 사골육수 같이 뽀얀 국물은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국밥에 듬뿍 들어간 얇고 부들부들한 돼지고기와 부속, 순대 등 원하는 재료를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 항정살로 만든 수육과 막국수도 이곳의 대표 메뉴다. 2025년 미쉐린 가이드 부산 편에서 합리적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한다는 빕 구르망에 선정됐다.
의성마늘국밥과 항정살수육백반을 주문했다. 두툼한 방짜유기에 담겨 나오는 국밥의 자태가 무척 고급스럽다. 의성 마늘을 메뉴 전면에 내세운 자신감은 말 그대로 의성산 마늘에 대한 자부심과 오마주다. 의성 마늘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인증하는 지리적표시 등록 제6호로 품질을 인정받은 명품 농산물이다.
경북 의성군은 전국 최대 한지형마늘 생산지다. 우리나라 한지형 마늘의 30%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의성마늘은 쪽수가 적고 단단해 저장성이 우수하며 알리신이 풍부해 마늘 특유의 맛과 향이 강하다. 정짓간에서는 의성에서 4대째 100년 넘게 마늘을 키우는 농가 마늘만 사용한다고 한다.
마늘을 넣은 육수 맛과 안 넣은 것의 차이는 확연하다. 목을 넘길 때 알싸하고 시원한 맛과 위장으로부터 전해지는 뜨뜻한 열감은 의성 마늘의 위력이다. 반쯤 먹다가 양념장을 푼다. 그러면 또 하나의 맛을 접할 수 있다. 처음부터 양념장을 넣어버리면 본연의 맛을 모를 수 있다. 먹는 방법을 달리하면 맛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과장 같지만 한번쯤 경험해 보시라.
항정살수육백반은 주문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 정도로 푸짐하다. 부산 돼지국밥 식당 수육 인심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짓간의 수육은 고기질도 좋았고 특히 쌈채소가 압권이다. 셀프바에서 언제든 넉넉하게 밑반찬을 조달할 수 있어 온전한 미식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김치와 깍두기는 눈으로 보기엔 고춧가루의 풋내가 여운으로 남을 듯했지만 뒷맛이 달았다. 정짓간의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은 고봉밥이다. 밥그릇에 한껏 눌러 담은 듯한 하얀 쌀밥이 인상적이었다.
정짓간과 같은 건물에 있는 빵집 부산당에서 몇 가지 빵을 사고 브라운핸즈에서 커피 한잔 후 초량이바구길을 걸은 것이다. 차이나타운은 주말이었지만 비교적 한산했다. 그러나 신발원, 마가(馬家) 등 교자집은 문전성시였다. 맛을 보려다가 대기줄이 너무 길어 포기할 정도였다. 다음날도 갔지만 여전히 식객으로 장사진이다. 오픈런을 하거나 한 시간 정도 대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맛보기 힘든 곳이다.
저녁 식사는 초량전통시장에 있는 ‘초량해칼국수’에서 독특한 한치칼국수와 해물파전으로 마무리했다. 칼국수에는 한치와 오뎅, 면사리 등을 추가할 수 있었어 오뎅을 더했다. 지도를 이용해 원산지표시를 해놔서 재미도 있고 이해도 쉬웠다. 식재료 대부분이 국내산이다. 자가제면과 직접 담근 김치에 국내 최초 한치 칼국수로 승부수를 띄었다.
부드러운 한치와 쫄깃한 면이 어우러진 초량해한치칼국수, 싱싱한 물총조개와 홍합, 어묵, 새우, 한치를 넣어 끓여 술안주로도 좋은 초량해전골, 물총조개와 홍합이 들어가 시원한 물총홍합탕, 해물 듬뿍 들어간 바삭한 해물파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감자전 등이 대표 메뉴다.
점심때 정짓간에서 아쉬웠던 겉절이 김치를 초량해칼국수에서 제대로 만났다. 먼저 제공된 해물파전은 파전의 도시 부산의 저력을 느끼게 하는 맛과 비주얼 등 가성비가 갑이다. 해물이 제법 많이 들어갔을뿐더러 계란도 한알 깨트려 넣은 비주얼이 군침을 한껏 돌게 한다. 부산의 첫날은 초량동만 걸어서 뱅글뱅글 누볐다. 그것만으로도 족한 부산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