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하고 매콤한 고추기름 내놓는 '괴산생극해장국'
고추는 우리 음식문화의 대표적인 식재료다. 고추는 고춧가루, 고추장을 통해 대표적이고 세계적 음식인 비빔밥, 김치의 화룡정점을 찍는다. 이 고추의 전래에 대해 관련 학계의 논쟁이 뜨겁다.
2018년 3월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1회 식량안보세미나-고추의 이용 역사’에서 권대영 한국식품연구원 박사는 ‘유전자 분석을 통한 고추 전래의 진실’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그간 정설로 여겨졌던 임진왜란 전래설(남방전래설)을 뒤집었다.
지금까지는 고추가 1600년대 임진왜란 전후 일본에서 전래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권 박사가 내놓은 새로운 학설은 이미 우리나라에 고추가 있었다는 한반도 자생설이다. 양측 모두 정확한 기록을 근거한 결정적 ‘한방’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권 박사에 따르면 고추는 우리나라에서 수 십 만년에서 수백만 년 전부터 자라고 있었다. 권 박사는 임진왜란 전래설을 논박하면서 외려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역전파설까지 내놨다. 권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재배돼 왔던 고추의 품종에 대한 유전학적 분석을 통해 연구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다른 일설도 있다. 일본이 16세기 초반 포르투갈로부터 고추를 받아들였고 이를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 고추를 전해 줬다는 설이다. 이 고추를 임진왜란 때 왔던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으로 다시 들고 갔다는 교류전래설이다.
고추와 김치 관련 논문을 검색해 보면 상당수가 고추 전래시기를 임진왜란 때로 보고 있을 정도로 아직은 남방전래설이 다소 우세한 것만은 사실이다. 음식문화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지만 문헌에 의존하다 보니 의견이 아직까지 엎치락 뒤치락이다.
논란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고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채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한때 국내 소비순위 1위, 세계 소비순위는 미국 다음으로 4위를 기록했다. 연간 고추 소비량 20~25만톤, 1인당 1년 소비량이 건고추, 고춧가루, 물고추 합산 3.8kg로 조사됐다. 우리 농가의 경제적 기여도도 쌀, 돼지, 한우에 이어 4위에 이른다. 다시 말하면 채소류 중에서 농가 소득기여도 1위 작물이라는 것이다.
농가 소득기여도 1위는 곧 우리 국민이 매운맛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반면 일본 음식에서는 고추를 사용한 눈에 띄는 전통 음식이 없다. 한 나라의 음식문화가 정착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성행했던 음식문화가 사라지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고추의 남방전래설은 권 박사의 문제제기처럼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남방전래설을 인용하는 많은 요리연구가나 식품영약학자들은 식문화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전통식생활문화전공 박채린의 석사논문을 보면 ‘임진왜란(1592)전후 이 땅에 드디어 고추가 유입되고 나서 식문화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고추가 식문화에 유입된 배경으로는 당시 의료용으로 산초 된장과 천초 된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대체할 수 있는 고추장이 의료용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치료용으로 식용하던 것이 점차 식품화되었을 것으로 본다’고 적고 있다.
참고문헌을 보면 명지대 교수를 지낸 강인희 교수가 공저한 ‘한국식생활풍속’(삼영사, 1984)이다. 많은 논문이 고추 전래설에 대해 강 교수의 책을 참고문헌으로 인용하고 있다. 강 교수의 선행 연구는 문헌고찰을 통한 것이고 권 박사의 경우 유전과학을 이용한 연구라는 점에서 접근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 검증 단계를 통해 고추 전래 문제가 다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고추 이야기가 길어진 이유는 필자가 괴산고추축제 평가위원으로 현장에서 느낀 바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괴산에서 열린 열아홉 번째 괴산고추축제장에 2박3일을 머물면서 고추 관련된 음식도 많이 맛보고 지역농민들이 땀 흘려 농사지은 고추 판매현장도 봤다.
괴산은 735ha 면적에 2000여 농가가 고추농사를 지어 2000여 톤을 생산하는 고추 주산지다. 인삼, 대학찰옥수수, 절임배추 등이 전략육성품목이다. 고추와 절임배추는 김장의 주재료다. 괴산은 김치 재료의 주산지로 발전할 수 있는 지역이다.
축제는 고추를 주제로 한 행사답게 ‘기승전고추’다. 수 천 개 고추 속에서 금반지(교환권)가 들어 있는 ‘황금고추를 찾아라’는 단연 인기였다. 또 ‘속풀이고추난타’ 역시 스트레스를 풀고 행사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축제 이튿날 이차영 괴산군수를 만난 자리에서 내년도 향토문화학술발표회 때 고추 전래설을 주제 삼아 보길 권했다. 이 군수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올해 코로나19로 인해 축제가 온라인으로 열린다. 괴산군은 '코로나19를 넘어, 2020 괴산순정농부 고추장터'를 주제로 오는 31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온라인 괴산고추축제를 연다고 밝혔다. 학술대회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축제장 밖 식당에서 의외의 고추를 이용한 식재료를 만났다. 3대가 40년을 이어온 ‘괴산생극해장국’은 고추 음식과는 관계가 없을 줄 알았는데 테이블마다 놓인 고추기름을 보고 무릎을 쳤다. 서울의 웬만한 해장국집에서도 고추기름을 내놓는 곳이 없다.
이곳 메뉴 중 사골육수 베이스의 선지해장국이 일품이다. 고추기름 좀 치면 양평해장국과 ‘사촌지간’이 된다. 구수한 사골육수에 고추기름을 치면 고소함이 폭발하면서 국물이 묵직하게 변한다. 올갱이해장국을 잘하는 서울식당에서도 잘게 다진 괴산표 매운고추를 넣으면 알싸함이 올갱이의 비린 맛을 깔끔하게 잡아준다.
한편으로 괴산엔 달리 ‘먹잘 게’ 별로 없다. 주민들의 이구동성이다. 그래도 마른수건 짜듯 지역 주민들에게 추천명단을 받았다. 강변매운탕, 칠성 한우타운, 꿀꿀이식당, 산수식당, 올갱이전골집 등이다. 매운탕에는 괴산 청결고추로 만든 고춧가루와 고추장이 들어갔을 거란 생각이 입안에 침이 잔뜩 고인다. 다음번에 괴산에 가면 꼭 맛볼 곳이다.
생극은 충북 음성군 북부 지역에 위치한 면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충주목 생동면(笙洞面)과 음죽현 무극면(無極面)으로 나뉘어 있었다. 음죽현은 지금의 이천시에 있었던 조선 시대 군현의 이름이다. 1914년에 두 면을 합치고 각각 한 글자씩 따서 생극면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