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의 벌레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빈곤에 처한 백 명, 천 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구해 줄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홍길동...?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감히 간단하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주인공 라스는 못돼 빠진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려는 의도로 도끼살인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 의도는 실패한다.
왜냐면, 노파의 동생인, 착하고 지적장애를 가진 리자베타까지 같이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의도를 완성시키기 위해, 그 상황에서, 목격자인 여동생만 살려두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닌가?
의도는 A였는데
상황이 B로 흘러가서
결국 의도가 퇴색되어 간 꼴이다.
이 "이중 살인" 덕분에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는 분명해졌다.
처벌과 분배는 정의 실현의 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분노는 정의를 촉발시킬 수 있지만 정의 자체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정의를 완성시키는 것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라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물론 이 책 안에서도 소냐, 소냐의 어머니 등으로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라스의 이론은 바로 그것, 용서와 사랑을 결여하기 때문에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전당포 노파는 과연 나쁜 사람인가. 악덕 고리대금업자라고 해서 과연 나쁜 사람인가.
죽어 마땅한 사람인가.
사회악인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사람인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인가로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악덕 고리대금업자, 인신매매범이 필요한 사람인 거냐고?
세상에는,,, 아니러니하게도, 나쁜 쌍놈의 새끼지만 필요한 사람이 있다.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기 힘들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며, 수많은 문장이 복선으로 깔려있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너무 충실하게 깔려 있어서 결코 대충 읽을 수가 없는 책이다.
심지어 17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을 다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을 정도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그거야말로 사람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거다.
가난은 죄악이 아닙니다!
"극빈", 그거야말로 죄악이죠!
극빈에 처한 자는, 몽둥이로 맞는 것도 아니라 빗자루로 쓸려서 인간 사회에서 쫓겨납니다!
마르 ; 아무 희망도 없이 돈을 꿔달라고 애걸한 적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 얻으리라는 걸 잘 알면서 말입니다. 실패하러 가는 거죠. 하하하
라스 ; 그렇다면 뭐 하러 갑니까?
마르 ; 왜냐하면, 막다른 길에 서면 인간은 어디로든 가야 하니까요.
막다른 길에 서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도박에 빠진 사람이 이런 심정인 걸까. 질걸 뻔히 알면서도 막다른 길에 선 인간.
범죄에 빠지는 인간, 캄보디아로 가는 젊은이들...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인간.
막다른 길에 서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술주정뱅이 소냐의 아부지(마르)는 집에서 돈을 훔쳐 나와서 술만 퍼마시다가 꽐라 돼서 라스의 부축을 받고 귀가한다.
집에 들어온 마르를 보고 아내는 개난리 친다.
그런 와중에 머리채 잡혀서 끌려가는 마르는 이렇게 말하지.
"이건 제게 기쁨이랍니다. 제게는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지요"
그렇다.
이런 인간군상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거다.
주인공의 여동생 두냐가 "돈 때문에" 돈은 많지만 오만방자한 늙은 꼰대(표트르)와 혼담이 들어왔다고 했을 때 주인공은 돈에 팔려가냐고!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된다! 며 반대한다.
그래서 이 결혼을 막기 위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없는 거야....)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거 아닌가.
돈을 얻어서 우리 가족이 잘 사는 대신에 그 오만함을 참느냐
VS
돈 없어서 굶어서 피골이 상접하지만 오만함에 굴복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 선택하는 거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돈도 적당히 있고 오만하지 않고 행복한 삶"
세상은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모범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노파를 죽이고 훔친 돈주머니를 "정의"를 위해서 사용했냐?
그렇지도 않다.
들킬까 봐 쫄아가지고 길거리 귀퉁이에 숨겨둔다. 그 돈주머니에 얼마가 들었는지도 모른 체 말이다.
행위는 있었느냐 의도한 결과가 없다.
대신 주인공은 그 행위에 대해 엄청나게 불안해하며 괴로워한다. (그럴 거면 살인을 왜 했냐고요!)
이 책의 80%가 주인공의 내적불안한 감정에 대해 쓰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각성한다.
내가 전당포에서 죽인 건
나 자신이었어.
그리고 소냐에게 고백을 하게 되고, 소냐는 자백하라고 하고,
옆방에서 몰래 듣던 놈이 주인공의 동생(두냐)에게 꼰지르고
풍비박산만 난다.
정의실현? 흥 개나주라고.
결국, 주인공은 자백하고 시베리아로 끌려가고, 소냐는 주인공을 따라 같이 시베리아로 가서 그를 기다린다.
이 방대한 책을 몇 줄로 요약하고 감상을 쓰기에는 너무너무 미흡하다.
생각하고 있는 걸 다 담을수 없을 정도고 한번 읽고 서평이랍시고 끄적일정도로 간단한 책도 결코 아니다.
다 읽고 이삼일이 지났는데 갑자기 내 자신에 대한 오만과 교만으로 회개하는 기분이 들었다.
법학도에 총명한 라스의 "정의"가
매춘부에 배운게 없는 소냐앞에 무릎꿇게 되는 부분이 나 자신이 얼마나 교만과 편협한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인지 일깨워줬다.
아니, 아니다. 한 두군데가 아니다.
이 책은 현대의 모든 잘난척하며 아는척 구구절절 써 놓은 책들을 압살시킨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이쯤에서 접자.
독서토론을 하더라도 밤새야 할 내용이고, 읽는 저마다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질 것이다.
역시, 명작 오브 명작이다.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