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뇌운 아래에서>

by 정윤희

반고흐 미술관과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렘브란트 미술관의 티켓은 퀘벡에서 미리 샀었다. 시차가 헷갈려 하루씩 빠르게 예약을 하는 바람에 잽싸게 리스케쥴링 요청 이메일을 보냈으나, 관람시각까지 48시간 이내라 조정이 어렵다는 답장을 받았다. 안 그래도 물가가 비싼 네덜란드에 착륙도 하기 전에 이렇게 7만 원가량을 날렸다. 그것도 입국하자마자 반 고흐 미술관까지 제시간에 도착해서 관람에 성공했을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래, 기부한 셈 치자. 그동안 반 고흐, 렘브란트, 베르메르로 커리어도 쌓고, 많지는 않아도 일정의 돈을 벌기도 했으니 이만큼은 내도 되겠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때 입장하지 못한 티켓은 며칠 뒤 모두 환불처리 되었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 내리니 캐나다보다 날씨가 포근했다. 재인이는 주변에 담배 피우는 어른이 많다며 투덜거린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대마초 냄새는 나지 않았었다. 우버로 차를 잡아 클링크노르트 호스텔에서 짐을 풀고 햄버거로 점심을 해결하고, 바로 반고흐 미술관으로 향했다. 물론 재인이와 나 모두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다행히 재인이는 아트샵에 있는 미피 인형이 몹시 맘에 들어 이곳에 온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맘에 들면 하나 사자고 하니, 너무 비싸다며 됐다 한다. 재인이가 원하면 나는 항상 아트샵을 먼저 들른다. 재인이가 원하는 코스를 제일 먼저 들러주면 이후 내가 원하는 코스를 재인이도 어느 정도 잘 따라다녀 주기 때문이다.


자화상부터 네덜란드 초창기 시절, 파리 시절, 아를과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까지 작품들이 연대기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사실 몹시 피곤하기도 했고 이미 도판에서 익숙히 봐왔던 작품이라 처음에는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한때는 이 작품들을 열렬히 사랑해서 열심히 도판을 보고 익히고 공부했지만, 작품의 실물을 대하는 내 마음이 그때 마음보다 훨씬 모자랐다. 열렬히 사랑했다가, 이 작품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읽고 썼던 탓에 심각한 번아웃을 겪었다가, 조금씩 회복을 해온 나이다. 예전의 나 같으면 이 경비와 여정을 견디며 정말 올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는지 따지느라 머릿속에 복잡했을 텐데, 그마저도 내려놓기로 한다. 나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게다가 다행히 4층, 전시의 거의 마지막 동선에서 이 작품을 봤다.


KakaoTalk_20251023_032154026.jpg 반 고흐, <뇌운 아래에서>, 1890



반 고흐의 <뇌운 아래서>라는 작품이다. 그가 죽은 해 완성한 작품이다. 반 고흐의 죽음에는 미스터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자살한 게 아니라 타인에 의해 총을 맞은 거라고 주장한다. 어쩄거나 심장에 총알이 박힌 채로 한나절을 누워있었으니,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간 반 고흐이다. 반 고흐는 임종의 스토리마저 드라마틱하다.


사실 그의 죽음이 아깝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즈음 그는 화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상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저명한 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몇 점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가 임종을 앞두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것은 그제야 열심히 그림을 그려 돈을 벌 수 있었고, 그래야만 동생 테오에게 빚진 것을 갚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 참 막막하다.


이 보다 훨씬 유명한 <까마귀 나는 밀밭>이 바로 오른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나의 마음을 빼앗은 건 이 그림이다. <까마귀 나는 밀밭>과는 다르게 배경이 아무 움직임도 없이 적막하기만 해서 무척 슬프게 느껴졌다. 화가로서의 성공이 시작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왜 그는 이런 막막함을 그렸던 것일까. 화가로서 성공하면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던 그 무엇이, 결국 화가로 성공하고 나서도 마찬가지라는 슬픈 결말을 알아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살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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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술관을 나와서 한 블록 걸어 나오니, 슈퍼마켓이 있었다. 그건 그간 암스테르담을 향한 여정에서 겪었던 여러 불쾌감을 한방에 날릴 수 있을 만큼 기쁜 사건이었다. 그곳에서 다른 데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며칠 치 물도 사고, 신라면 김치맛 컵라면도 샀다.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아 우리는 품에 컵라면 하나씩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에 생각 없이 급히 시켰던 햄버거 세트가 우리나라 돈으로 6만 원어치였다. 양이 너무 많아 주방에서 포장 용기를 받아다가 남은 부분을 넣은 후 서늘한 곳에 놔두었었다. 다시 열어보니 다시 먹고 싶은 비주얼은 아니었지만 가격을 생각해 참고 먹기로 했다. 오늘 득템 한 컵라면과 함께. 컵라면도 여기서는 매우 비싸지만, 운 좋게 1+1로 구입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목구멍을 흐르는 얼큰한 국물에 피로가 조금은 풀린 듯 했다. 햄버거 패티는 질 좋은 소고기를 두툼하게 다져 만들었기 때문에 맛이 좋았다. 아까는 너무 피곤해서 그 맛을 잘 몰랐던 것 같다. 게다가 토마토, 양파, 양상추 모두 아직 싱싱한 상태였다. 빵도 부드럽고 향이 좋았는데, 양이 많아 남기기로 한다.


티켓으로 7만 원을 날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인이가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엄마, 우리 여행 다니면서 하루에 한 번은 꼭 큰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어. 이번에 처음으로 생긴 거야."


그래. 네 말이 맞다, 맞아. 이만하면 성공적인 여행이야. 우리 딸 천재야.



2025.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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