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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Apr 02. 2018

노인들의 캐나다 이민 생활 2

그까짓 껏 두 번 이민 못 가랴

'인조이'와 '엔죠이'이가  영어 enjoy의 거의 비슷한 발음인데도  엄청나게 다른 뜻을 지니고 있는 줄을 친정어머니가 이민 오시고 나서 처음 알았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하던 시절에 아들이 없고 딸 둘이 다 캐나다에 사는 죄(?)로 69세에 이민을 오신 어머니. 남에게 손톱만큼도 민폐를 끼치기 싫어하시고  깔끔함의 대명사였던 분이 혼자 이민 수속을 다 마치고 드디어 공항의 자동문이 열리자 회색의 타이트한 원피스에 스카프까지 두르시고 10시간의 비행시간에도 흐트러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고고한 자태로 나타나셨다. 너무 늦게 나오셔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동생과 나는 반가움과 안도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대단하셔'하는 눈빛을  순간적으로 교환하면서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잠시 우리 집에 계시다가  아파트로 이사하셔서 혼자 사셨는데 이사 다음 날부터 일어난 에피소드들을 어찌 다 말하랴.  


한국에서 아파트의 일 층에 사실 때 잔디밭에 이불을 털던 습관대로 아침에 베란다에서 개운하게 이불을 활활 터는데 바로 아래층에 살던 사람이 아침에 커피 한 잔 들고 상큼하게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위에서 자그마한 동양 할머니가 이불을 털어대니 김샌 건 불론이고 아파트 법에 어긋나다고 매니저한테 말해서 경고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줄줄이 컴플레인. 내가 양 손에 시장을 봐서 어머니 아파트에 가면 현관 신발 장위에 노티스가 여러 장.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머니가 영어를 못 읽으셔서 상처받은 일은 없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시차 때문에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주무시고 짐 정리를 하느라고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옆집 할머니가 난리를 치지 않나. 한국에서 짐 쌀 때 깨질 만한 것들을 싸 온 종이 타월을 버리기도 아깝고 화장실 휴지도 아낄 겸 종이 타월을 화장지 대용으로 쓰다가 변기가 막혀 물이 넘쳐서 욕실이 아수라장이 된 적도 있었다. 어떤 한국 할머니는 영어를 모르니까 작은 튜브 타입의 강력 접착제를 안연고인 줄 알고 눈에 넣으려다가 아들이 발견하고 기겁을 한 일도 있었다는데 이민 온 한국 할머니들의 정착기는 울고 웃는 개콘 내용이다. 하필 왜 ' 인조이'가 웃겼냐 하면 하루는 어머니가 서양 할아버지와 단 둘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난생처음 보는 코쟁이 할아버지가 싱글싱글 웃다가 내리면서 '엔죠이'라고 했다고 기분 나쁘다고 하시길래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엔죠이라는 말이 사귀자는 말이 아니냐?

아니,  무슨' enjoy'가 사귀자는 말이지?  ' 매일 비 오는 밴쿠버의 침침한 겨울 날씨에 해가 나니까 잘 지내라는 뜻으로 한 인사말이다'라고 설명을 해드렸건만 계속 고개를 저으시면서 '엔죠이'는 안 좋은 뜻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 6.25 전쟁 이후에 카바레가 많이 생기고 아줌마들이 장바구니 끼고 사교춤을 추다가 걸리기도 하고 제비족이란 단어도 생기는 등 해빙 분위기에다가  미군부대의 PX에서 암거래로 나온 미제 물품과 함께 영어도 미제 장사 아줌마들이 드나들던 가정집에도 흘러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본어로 공부해서 영어는 모르던  어머니도 어찌어찌 들은 영어 가운데서 'enjoy'의 변질된, 남녀가 즐긴다는 뉘앙스로 알고 있다가 캐나다에 와서 서양 할아버지가 사귀자는 줄 알고 기겁을 하셨다는,  말도 안 되는 왜곡된 영어로 한방 먹은 한국 할머니가 겪은 기막힌 문화충격이었다.    


가족의 재결합이라는 캐나다의 인도주의 정책으로 부모, 배우자, 형제 등 가족 초청은 당연한 것인데 특히 부모 초청은 자신의 가족 수와 부모까지 합쳐서 살아갈 수 있는 3년 연속 소득이 입증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부모를 초청하면 10년만 스폰서를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20년으로 늘어났다.

초청한 자녀가 20년 동안 부모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므로  노인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요새는 지원 서류를 추첨을 하기 때문에 로또도 아닌 것이 안 되면 기다리는 것이 하세월이니 신청자들은 그동안 부모님들의 건강이나 여건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이 느리지만 일단 결론이 나면 변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꾸~준하다는 것이 장점이랄까?

연금도 신청해서 받기까지가 시간이 걸리고 서류 심사 중에 좀 미심쩍다고 생각되면 100여 가지 질문과 답이 오가는 데 오만 년이 걸리지만 승인이 나면 정해진 시간에 한 치 오차도 없이 연금이 통장으로 지급된다. 물가가 오르면 그것도 새 오줌만큼 반영하고.  투쟁할 필요도, 투쟁한다고 되는 것도 없는 캐나다가 어떤 때는 편하다가도 한편 꽉 막힌 듯 고구마가 한 가마인 나라처럼 느껴진다.    


가족들과 평온한 소녀 시절을 보내다가 6.25 전쟁이 나서 피난길에 나섰다가 밤중에 강을 건너는 배의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어머니보다 열 살이나 어린 늦둥이 막내 여동생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는 바람에 귀찮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반쯤 건너온 강을 다시 되짚어 돌아가서 집에다 데려다주고 온 것이 영영 이별이 되었다는 사연이 실향민인 어머니의 슬픈 이야기 중의 진수였다. 그런데 어머니 인생에 또 한 번의 피난 아닌 피난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동생이 이민 오자마자 어머니 초청을 한다고 하니 '니북에서 피란도 왔는데 까짓 이민쯤이야 대수냐'라고 이북 사투리를 쓰시면서 쿨하게 대답하셨다. 그래서 LA에는 6.25 때 이북에서 피난 온 교민들이 많다고 한다. 

내 아이들에게 외할머니가 여고시절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이셨다고 이야기해주었더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처럼 할머니를 쳐다보았던 큰 아들이 아이스하키의 나라에서 아이를 낳더니 걸음마를 하자 스케이트를 배워주더니 세 살이 되어 드디어 아이스하키를 배워주고 있는데 만약 소질이 있으면 증조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리라.

평양의 꽁꽁 얼은 대동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소녀가 피난을 와서 이젠 더 이상 몸서리쳐지는 피난은 없을 거라고 남한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노년에 피난이 아닌 이민을 오신 어머니의 지난한 삶.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 살던 후암동에서 하도 고와서 '그레이스 켈리'라는 미국 여배우의 이름을 별명으로 가졌던 어머니의 미모도, 강인한 정신력도, 생활력도 닮지 못한 나는 좌충우돌하면서 이민 생활을 살아내고 있다. 단지 외형적으로 어머니를  닮은 것이 있다면 가위질을 할 때 입술을 씰룩거린다거나 립스틱을 칠할 때 입술 끝의 가장자리까지 칠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표현을 잘 안 하는 아들들도 나 보고 점점 외할머니 포스가 나온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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