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모르던 시절에 커튼 같은 옥양목 천 사이로 뛰어다녔다. 건조기에서 갓 나온 따끈하고도, 먼지가 빨려나간 옷들과 타월에서 나는 메마른 화학적인 향과는 다르게 그 옛날의 빨래에서는 마른 천의 거친 감촉과 그 올에 배어있던 어른들의 살 냄새가들큰하게 풍겨왔던가.
암튼 여왕 같은태양의 화려함과 콜라보되었던 여름 빨래의 기억도 이젠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낯선 서글픔에 잠긴다.
무엇을 먹어도 하루에 밥 한 끼는 먹어야 되듯이 무엇을 해도 다 받아주고 내 말을 경청해 주고 항상 내편을 들어주는 남편은 밥이다.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며 핀잔받는 밥상에서 처럼 어떤 때는 흐뭇하고 또 한편으로는 밀어내고 싶은 자녀들을 볼 때
결국 편애도 편식처럼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편애라는 뜻이 반드시 부모가 자녀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잔소리를 싫어하는 딸이 아빠보다는 엄마를 좋아하는 등 자녀도 부모에 대한 호 불호가 존재한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어우러져야 하고 고우나 미우나 찰떡처럼 붙어서, 진저리가 나도 밥과 반찬의 숙명처럼 매일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살림도 마찬가지이다. 유튜브를 통해서나 이웃을 통해서 알게 된 상식들 중에 이 연세(?)가 되도록 모르는 것이 많아서 깜짝깜짝 놀란다. 인생살이도 살림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는다고 다 알 수 없고 오히려 점점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릴 때 시험 보고 다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엉망이고 많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점수가 잘 나왔을 때의 어긋난 예측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싫어서 일탈을 꿈꾸고 행해본들 다시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야채를 씻는다. 드라마에서 보면 친정엄마가 딸네 집에 반찬을 가져다주려고 만드는 나물 중에 시금치가 많이 등장한다. 시금치 한 단을 데쳐봐야 한 줌인데 드라마에선 도대체 몇 단을 쓴 것인지 무지 많더라.
비빔밥에 꽂혔을 때는 몇 날 며칠 나물만 해대고 당근케이크에 열심일 때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루타가 되어 당근과 베이킹 소다의 쌉쌀한 케이크를 질리도록 먹어주었다.
코로나로 인한 집콕 때문에 집밥의 위대함을 깨닫는 동시에 지겨움 또한 알아버렸다.
그렇게 몇십 년 밥을 했으면 이제 눈을 감고도할 경지에 이르지 않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왜 사냐고 되묻고 싶어 진다.
개연성 없는 질문이라 대답도 그렇게 하고 싶어질 뿐.
참, 하와이에 가면 진짜 '빵나무'라는 이름의 나무에 빵이 열린다고 한다.
생긴 것도 잘 구운 빵과 비슷한 갈색 열매인데
그 열매를 따서 바비큐 하는 한쪽 구석에 던져 놓았다가 구수한 누룽지 냄새가 나면 꺼낸다고.
껍질을 벗기면 갓 구운 빵과 똑같은 뽀얀 색과 쫄깃한 질감이 너무 맛있다네.
그래서 노숙자들이 길거리에서 그 열매 하나 따서 신문지 뭉쳐서 불을 지펴 그 속에 넣어서 구워 먹으면 주식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