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을 키울 때도 예쁘고 신기한 것보다는 힘만 들고 어서어서 커서 육아에서 벗어나기만을 학수고대했었다.
특히 첫 애는 어찌 먹성이 좋은지 돌이 지나서 저녁에 우유를 든든히 먹여서 재워도 자다가 잠결에 1시간 간격으로 물과 우유를 교대로 찾는 통에 잠을 설쳐서 몸이 찌들 대로 찌들어서 절대로 둘째는 안 낳을 거라고 밤마다 맹세를 했다. 장난은 둘째가라면 서러운지 아무 의미 없이 뛰다가 남의 집 담벼락으로 돌진을 해서 이마를 찧지 않나, 그 당시 주택의 시멘트 담장면 전체가 뾰족 뾰족한 돌기 모양이었다. 담의 윗부분은 사이다 병이나 갈색 맥주병을 어슷어슷 깨뜨려 꽂아서 시멘트를 양생을 시켰다. 좀도둑 예방 차원에서그런 원시적인 데코가 유행이었다.
이마에 피가 철철 나면 내 마음은 철렁해서 당장 아이의 두개골이 빠개진 것 같아 놀래기도 했다. 밤에 자다가 자지러질 듯이 울어서 물, 우유를 줘도 도리도리 하고 계속 울어서 몸을 샅샅이 살펴보니 낮에 어디서 주웠는지 노란 고무줄이 손목을 파고들어 피가 안 통한 채 손이 통통 부어있어서 놀라고.아기 키우기가 경기의 연속이었다.
맹세의 맹세를 거듭했던 단산을 뚫고 나온 4년 터울의 둘째는 순하디 순한 양 같아서그 또한 신세계였다.
그래도 벌찬(이북 사투리로 결기가 센)아들 둘을 키워보니 애들이라면 죽고 못살아서 쭉쭉 빠는 타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더 비정한 엄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커서 결혼을 해도 애를 낳지 않아도 상관없고 낳아도 그저 그렇고
별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큰 아들이 또 아들만 셋을 낳았다.
2살 터울로 착착 낳았는데 막내는 낳을 때부터 내가 베이비 시팅을 했다.
터키에서 돌아온 이유도 막내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며느리가 막달일 때 와서 초등학교 갈 때까지.
문제는 갓난아기 때부터 돌봐서 그런지 새록새록 정이 가고 귀여울 뿐만 아니라 발가락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자라나면서도 위의 두 형과는 다르게 재치가 있고 할머니 생각을 하는 등 제 사랑 제가 받는 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첫째와 둘째는 어떨까?
첫째는 내가 터키에 살 때 백일, 돌, 둘째가 8개월 때 두 애기들이 밴쿠버에서 이스탄불까지 무려 24시간 걸려서 방문을 했었다.
꿈에 떡 본 듯이 잠시 만났다 헤어진 아기들과 태어나서부터 봐온 아이랑은 확실히 틀리다. 프리 스쿨에 데리러 가서 기다리면서 교실 안에 장식해 놓은 아이들 그림이나 공작 물들을 마치 내가 외계인이 된 듯 신기해서 보고 또 보았다. 몰랑몰랑한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오는 길은 또 얼마나 달콤한지 마음속이 마시멜로가 녹는 듯 부드러워지곤 했다.
내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줄 때에는 이 장난꾸러기를 얼른 떼어서 유치원 선생님에게 위탁물을 맡기듯 얼른 들여보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오곤 했다. 그저 힘만 들었다.
그런데 손자는? 결이 다른 애정이 솟아나더라.
그러던 아가들이 이젠 10살이 넘어서 만나도 인사만 삐쭉하고는 다들 제 방으로 사라져 버린다.
여자 아이들은 대 여섯 살이 되면 겉옷을 입을 때 안에 입은 티셔츠의 소매 끝을 앙증맞은 손으로 잡아당겨서 붙잡고 겉옷에 소매를 넣는다. 속옷의 팔 부분이 올라가지 않게.
남자아이들은 운동화 끈을 엉망이라도 자기가 묶는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다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세월을 지나 훌쩍 커 버렸지만 여전히 귀여운 것을 어디다 비교하랴.
지난여름 큰 아들, 남편, 10살짜리 둘째 손자가 밴에다가 이삿짐 일부를 싣고 먼 길을 떠났다. 무려 거의 6000킬로나 되는 캐나다 횡단을. 그 이유는 동부의 퀘벡주에 있는 몬트리올로 가기 위함이었다.
며느리가 프렌치 캐네디언이며 불어 선생을 하다가 일 년 휴직을 하고 온 가족이 불어 연수를 위해 일 년 살이를 떠난 것이었다.
불어로 공부하느라 땀 뻘뻘
강아지도 이사에 동참
캐나다는 실제로 다문화 국가이므로 어떤 언어를 써도 자신의 커뮤니티에서는 자유롭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불어이다. 동부의 퀘벡주만 유독 불어 우대 정책을 쓰고 다른 주에서는 면피용으로 공식 서류나 물건에 영어 불어를 혼용하는 정도이고 실제로는 영어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 공무원들은 아직도 영어, 불어를 둘 다 유창하게 해야 유리하다고 한다. 그래서 고위층으로 갈수록 불어 못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캐나다 공무원이 퀘벡 불어를 하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출장 가서 회의를 할 때 프랑스 사람들이 캐나다 사람이 불어를 하면 뒤에서 피식거린다나. 발음이 본토 발음이 아닌 남 프랑스식 사투리라고
캐나다에 살면서 그래도 불어는 해야 된다는 부모 때문에 애들이 고생인 것 같은데 애들도 부모를 잘 만나야 덜 고생.
얌전하나 정이 많고 남을 도와주길 잘하며 혼자 잘 노는 조용한 둘째가 4박 5일의 대륙 횡단길에 따라나선다고 해서 의외였다.
아이들의 엉뚱한 면에서 가능성을 보고 그래서 자라나고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보람이라는 거였다.
막내손자와 프렌치 보이로 변한 사춘기 큰 손자
2년 동안의 코로나 기간 동안 집안에서 만나지 못하고 아들네를 갈 때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데크에서 불을 피워놓고 뜨거운 홍차나 커피를 마시고 애들 얼굴을 잠깐 보고 돌아올 뿐이었다.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지났는데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코로나 아니라 세상없어도 아이들 없는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는데.
자녀들은 곤란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말이다.
코로나 첫 해는 겨울에 노인들이 많이 생명을 잃고 힘드니 어찌어찌 설득이 되어서 모임을 못 하고 지나갔다. 외갓집에서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에 코로나도 오락가락하니 절대 자비가 없었다.무조건 모여야 된다고.
어두울 때 집 뒤로 들어오라 해서 살금살금 가는데 막내가 큰소리로 '그랜마'라고 외쳐서 어른들이 아이의 입을 막고 생쇼를 했다고.
그 당시에는 집안에서의 모임도 인원 제한이 있어서 그렇게 떼로 몰려들어가면 신고가 들어갈 정도로 살벌했다. 마치 히틀러 시대에 창문 뒤에 숨어서 유대인들의 왕래를 엿보는 나치가 언제 고발할지모르던상황처럼.
벚꽃이 피거나 여름에는 우리 아파트의 뒷마당에서 만나곤 했던 코로나 시절
밴쿠버도 겨울 운동을 할 수 있는데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그 추운 캐나다 동부로 갔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코로나 상황으로 자주 못 만났던 일들이 전조현상으로 미리 떠나는 연습을 했는지도 모른다.
몬트리올에 도착한 지 3개월 정도부터 아주 이사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뉴스에서 어느 지역에 지진이 났다는 것보다 내 마음에더심한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일 년 살이는 좋은 경험을 하고 오라고 가볍고 기분 좋게 보내 줬는데
아주 이사를 한다니.
그 말을 들은 내 마음은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은 여행자처럼 우왕좌왕하는 형색이 되었다. 처음엔 손자들을 못 보는 것이 서글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중년의 아들을 못 본다는 것 때문에 알싸한 그 무엇이 갑분 가슴에 서리처럼 내려앉는 것을 순간 느꼈다. 아이일 때도 생전 못 느꼈던. 내가 진짜 늙었나 봐.
사실 언어는 생명력이 있어서 쓰지 않으면 퇴화하다가 소멸된다. 불어를 일 년 배우고 돌아와서 사용을 안 하고 영어만 계속 쓰면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니 일 년만 하고 돌아오라고 권유할 이유도 명분도 없으니 이젠 그저 헤어질 수밖에. 가을에 방문해서 애들을 보고 와서 갈증은 해소됐으나 같은 도시에 없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마음에서늘한 한기가 돈다.
나의 음흉한 바람은 올 겨울에 그쪽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 무지무지 추워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겠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기후 온난화로 밴쿠버에도 눈이 오고 동부의 겨울도 덜 추워졌다고 한다.
그래도 동북부는 아직도 끔찍하게 춥고 눈이 쏟아질 때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현관에서 바지에 묻은 눈을 털려고 손으로 탁 치면 얼었던 바지 한쪽이 떨어져 나갈 정도인 전설의 얼음 왕국이었으니.
그나저나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집 안과 밖에서 규제 없이 만날 수 있으나 다 떠나갔으니 이젠 만날 아이들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