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각을 할 때마다 엉겨붙은 흙이 된다.

순간 한 조각(11/30)

by Shysbook


12살 때의 나와 22살 때 바라본 엄마를 떠올린다.


12살, 운동장 위로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가을. 계주를 하고, 줄다리기를 하고, 마스 게임을 하고, 콩주머니로 박을 터뜨리는 수 많은 아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덮인 맑은 아침, 점수판에는 이미 백팀이 청팀보다 큰 점수차로 앞서 있었다. 무조건 상대편을 이겨야한다는 승부욕이 강한 아이는 점수를 애써 부인하고서 애꿎은 땅만 발로 툭툭 치며 모랫바람을 날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편 도시락에 먼지가 전부 들어가라는 그 당시 괴씸하고도 소심한(?) 복수심은 아닐까 싶다.)


속상한 마음을 툴툴거리던 순간 학부모가 모여있는 바리케이트 너머로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가 보였다. 젊은 나의 엄마는 베이지색 바지에 푸른색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고 화장을 한 채 평소보다 젊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의 얼굴은 고운 모래처럼 주름이 없었고 피부를 만지면 곱게 흘러내릴 듯했다.


수 많은 경기를 치루고 맞이한 점심 무렵, 엄마는 한 손에 은박지로 감싼 김밥 한 줄을 건네줬다. 이미 체육복 바지와 상의엔 오랫동안 움직이면서 묻은 흙먼지로 가득했다.


엄마는 하나 밖에 없는 말썽쟁이 아들을 위해 직장에 있다 바쁜 시간을 내어 점심 무렵에 오셨다.

그가 홀몸으로 시작한 일은 흙먼지들로 나풀댔다. 건장한 어른들마저 마실수록 매캐해지고 움직일 때마다 더러워지고 의도하지 않더라도 더럽혀지는 곳이자 이질적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자들 사이에 엉겨붙는 곳이었다. 뭉쳐도 뭉쳐지지 않고 금새라도 으스러질 것 같은 흙처럼 약한 몸뚱이를 지닌 엄마는 그들 틈에서 눈물과 땀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으나 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애써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나도 씩씩하고 싶었다. 상대를 이겨내며 ‘엄마 나 잘 하고 있어!’ 라고 애써 인정받길 원했나보다.

하지만 경기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점수판을 바라보며 지고 있다는 사실에 분해 ‘쒸익! 쒸익’ 하며 거친 한 숨을 내쉬면서 상대편을 원망하곤 했다. 씩씩하긴 커녕 상대의 질투에 시기하는 속좁은 나였으니까.

그런 모습을 바라본 엄마는 안타까웠는지 되려’ 그러지 마라’ 고 울상을 짓다 속상해하면서 나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다시 엄마와 헤어졌을 때, 나의 마음은 바지에 묻은 흙먼지처럼 찐득함이 느껴졌다. 보고 싶고, 그립고, 쓸쓸함에 안기고 싶은 마음하고 혼자서도 잘 있다며 옷에 묻은 흙을 손을 훌훌 털어내보지만 쓸쓸한 감정은 털어내지지 않았다. 엄마와 나 사이는 그렇게 흙먼지처럼 엉겨붙어있었나보다.


10년이 흘렀다. 장성한 나는 장성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있었다. 어머니 홀로 면회를 오신다니. 나는 토요일 오후 군복을 입은 채 어머니가 오시기만을 기다렸다. 면회가 열리는 회관에서 어머니가 보인다. 빨간색 플라스틱 아이스박스를 한 손 가득 인 채.박스를 열어보니 전복과 도시락 그리고 과일이 담겨 있었다. 장성한 아들을 위해 장성까지 찾아오는 정성에 나는 마음이 또 울컥했다.


부산에서 장성까지 동에서 서쪽으로 어떻게 오셨을까. 새벽녘 피로한 몸을 이끌고 부지런히 요리를 준비하시고서 기차 혹은 버스를 여럿 갈아타고서 여기까지 오신 어머니의 수고에 단 한 두 시간을 위해 나를 만나려 여기까지 찾아온 그의 노고에 마음이 기쁘다가 부끄러워지다 이내 숙연해진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바라 본 엄마의 얼굴은 이제는 고운 모래가 아닌 10년 넘게 쌓이고 켜켜이 흙처럼 굳은 채로 있었다. 화장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세월의 흔적이 보인 채, 이른 출근으로 쌓인 피로함과 현장에서 거친 사람들끼리 모여 생긴 거칢의 흔적 그리고 가장의 무게가 마치 흙먼지처럼 뭉쳐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10년 동안 빚은 세월은 바다처럼 험난했고, 운동장보다 더 치열했구나 싶었다.


나는 엄마 생각을 할 때마다 엉겨붙은 흙이 된다.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섞여있어서일까, 누구보다 떳떳하게 서고 싶지만 부끄러움이 앞선다. 언제라도 거친 상황 속에서 자라 나를 받쳐 준 그대의 노고를 나는 잊지 않으려고한다. 그대가 묻힌 흙먼지를 어린아이처럼 부비적거려본다. 감사를 그리고 미안하고도 부끄러운 감정이 온 몸으로 스미기 시작했다. 조금씩 모아 간직한 흙먼지 위로 튼튼한 뿌리를 지닌 식물이 되고 싶다. 욕심인 건 알지만. 노고라는 흙은 곱디고운 귀한 양분이 되리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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