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한 조각(23/30)
고3 시절, 연배가 지긋하신 구루께서 “고등학교 때는 입시만 걱정하면 되는데, 막상 대학가고 시간 지나면 걱정이 너네들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 늘어난다” 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선승이 직접 겪은 인생 독해법보다 눈 앞에 놓인 영어 지문 한 줄을 읽는 것이 더 급했던 터라 듣기만 하고서 고개만 끄덕거리기만 했지, 문제집 앞에 고개를 쳐박고 지문만 바라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지문을 해석할 때, 절대 나의 주관이 개입될 수 없었다. 철저히 출제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선택지를 신속 정확하게 골라야 점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글을 읽고 느낀 소감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올바른 문법, 단어, 문장 구조를 빈 칸에 채워 넣는 숙련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합불이 나뉜다. 어째보면 수능만큼 정직하면서 잔인한 절차는 없다고 생각한다.
혹독한 입시만 견디면 대학에서는 팔자가 조금 필 줄 알았다. 더 이상 출제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정답을 끼워 맞추는 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듯 했다. 프랑스에서 실시하는 바칼로레아처럼 내 생각을 시험에서나 앞으로 미래에도 자신있게 후루룩 풀어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대학에 와서는 취업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않았다.
모든 경험에는 갖가지 이유가 붙어야 했다. 그저 재밌어보여서, 흥미가 끌려서라는 감상적인 반응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이 경험을 했던 진짜 이유를 이력서를 쓰거나, 면접을 볼 때 직장 상사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여 나라는 상품가치를 높여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합불이 나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은 경쟁의 연속이었다. 다만 자유도 범위가 넓어진만큼 주어진 과제의 난도 또한 더 높아졌다.
해를 거듭할수록 긴장의 끈을 더더욱 조여야했다. 더 나은 역량을 발휘해야했고 그렇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정신차리자고 셀프 자극을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가 졸음이라도 쏟아지면 뒤로 나가서 잠을 깼고 온 몸을 때려가면서, 허벅지를 꼬집어가면서까지 와락 쏟아지는 졸음과 한 바탕 사투를 벌였다. 대학에서는 밤새면서 과제와 시험공부를 하는 건 물론, 방학마다 타 학교로 설계하러 가면 하루 날밤을 새는 건 필수였다. (물론 나는 새벽 4시 넘어가면서 고비를 겪었지만.)
그렇게 나의 열정과 혼신을 보여야 원하는 결과를 보일 수 있었다. 이마저도 견디지 못하면 나약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더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그렇게 노력했어도 원치않은 결과가 나올 때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과제를 할 때 좋은 성적을 못 받거나 수상의 실패로 이어진 건 내가 더 신경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의 노력 부족, 의지 박약이라 탓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고 잊으면 그만인데, 문제는 삶 곳곳에 스며 드는 순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다.
아주 사소한 일도 못하면 ‘나는 노력이 부족했어, 이 것도 못하는 나는 한심해.’ 라고 스스로를 탓했다.
잘 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집착했다. 아끼지 못했기에 스스로 갉아먹기 시작했고 나는 이 정도 밖에 안되는구나 싶었다. 조금이라도 하면서 자존감이 쌓여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시야라든가 대하는 내공이 달라지는데, 자책의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존감은 커녕 제자리 걸음에 불과하다.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만 뾰족해지게 된다.
나를 그렇게 밀어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싶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따랐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무시를 딛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은 아니었나 싶다. 버려지고 소외받는 것에 두려움이 컸던 나로써는 자책을 해가면서까지 원하는 결과를 얻어야한다는 강박이 집착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었다.
이런 집착은 업무 성과를 넘어 인간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하고 품어야한다라고 여기고 상처를 주면 떠나지 않을까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모두를 사랑할 수 없는데, 나는 그런 것이 서툴었다. 관계가 서투니 자연스레 집단에서 녹아들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선미씨가 같은 프로에 출연한 멤버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며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원더걸스를 탈퇴하고 힘든 시기를 지난 후 ‘경계선 인격장애’ 를 앓았다고 서두에 밝히면서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다.
"근본적인 걸 해결해야 주변 사람들도 편할 거 아니냐. 이게 주변사람들이 힘들다고 하더라. 나는 내 주변에 있는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나 때문에 피해를 안 받았으면 좋겠고, 사랑을 주고 싶은데 그게 결국 내가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 않느냐. 그때는 진짜 멈췄어야 했던 것 같다.
(중략)
그때는 진짜 내가 잠시 멈췄어야 했던 때였던 것 같다. 너무 일찍 데뷔하고 어떻게 보면 너무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거다. 청소년기에 자아가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차 안에서 보내지 않았나. 나 자신을 돌보고,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고 이런 걸 하나하나 알고 내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이제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먹는 약도 정말 많이 줄였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저는 되게 강하다, 강해졌다.”
자신을 돌보고 기분을 맞추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수록 나를 점점 갉아먹는 일이었다. 이를 딛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선미씨는 분명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남의 눈치 안보고 나의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힘들면 힘들다고 놓아버리고 멈추는 일은 눈 앞에 놓인 시험문제보다 힘든 일이었다. 삐그덕거리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다독이기 위해 내 목소리를 들었어야했는데, 오히려 그 시기 동안 동기부여 영상을 본다며 나의 마음을 더 채찍질 했다. 내 목소리보다 타인의 의지가 내 마음에 자리잡는 것이 어릴 적부터 지속될수록 고착화 또한 되기 쉬운 듯하다. 동기 부여 영상은 어디까지나 아주 넓은 세상 속 지극히 일부인 타인의 의견일 뿐이다. 오히려 자신을 돌보는 일이 넓은 세상을 살아갈 동기 부여가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삶의 걱정이 늘어간다던 구루의 말은 참이었다. 어떻게하면 학교가지라는 생각에서 어떻게하면 취업할 지, 먹고 살지, 독립하고 살지, 내 자책을 어떻게 줄일지 걱정의 범위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간다. 하지만, 학교에서 치른 시험과 달리 인생이란 시험은 출제자의 의도도 알 수 없고, 정답도 뚜렷하게 내릴 수 없고, 선택의 이유를 굳이 설명해가면서 납득시킬 이유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나의 선택에 조금은 확신을 가지면 성공과 실패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질까. 두려움은 약간 따를지라도
수를 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 그만 아닐까 싶다. 동기 부여 영상을 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보다 번아웃이 찾아오고 여유가 없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면 자책 하기보다 자신을 돌봐야한다. 충분히 쉬어주고 잘 먹고 건강을 챙기면서 의욕이 생길 때 더 열심히 달리면 되니까.
(사진 출처:http://www.looa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