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없는 기분_2

서점에서 일을 한다는 것_29

by Shysbook

기분이 없는 기분_2

휴일 오전 아침. 집 근처 병원을 찾았다. (a.k.a 정신건강의학과, 이 글에선 ‘병원’ 으로 통칭할 것이다.)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젊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거진 다 연배가 있는 어르신이셨다.


평일 젊은 사람이 이런 병원을 찾는 게 흔치는 않으니 의아하게 보실 어르신들도 계실 거라 생각한다.


접수처에 들러 간단한 신상을 작성한다. 이름, 나이, 성별, 주소, 연락처는 늘상 쓰던 것이었으니 아무렇지 않게 이어서 써내려간다. 그러나, 어떤 증상으로 찾아왔냐는 빈 칸에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글의 흐름은 내 기억력처럼 ‘툭’ 하고 끊어진다. 손에 쥔 펜촉은 무엇을 써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저 허공 위에서 종이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 떠오르는 수많은 잔기억이 내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간신히 기억의 덤불을 헤집고나서야 비로소 내가 무엇때문에 힘들었는지를 적을 수 있었다.


‘번아웃’ (이라 적었지만, 실제로는 그 후로 찾아오는 우울감이 정확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을 상담이었다. 남 앞에서 말을 조리있게 잘 하지 못해서 횡설수설할까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은 나를 안좋은 시선으로 바라본 채 나를 문제있는 아이로만 인식해버리고 권위를 앞세운 채 나를 가르치려들까 걱정이었다.

사실 그런 마음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2년 전, 타지에 살았을 당시 병원에가서 상담을 받았을 때다. 쌀쌀맞은 선생에게 데인 이후로 불신하게 된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우울은 심각 수준이었고, 상담 끝에 나의 밑바닥을 자꾸만 들여다보니 관계의 얽힘에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생은 인내심이라곤 찾아보지 못하고선 ‘넌 완벽주의가 문제다.’ 라는 식으로 단정지어버렸다. 그 선생이 앉은 테이블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횡설수설했던 말에 답답해서 결론을 애써 내린 것일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청자의 태도는 의사로써 0점이라고 생각했다. 형편없는 진료에 나는 자리를 나왔다. 덕분에 내가 엿같은 상황에 엿같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10분 후, 접수원의 안내를 받고 원장님께 상담을 받으러 들어간다. 약간의 긴장과 걱정을 간직한 채 방 안에 들어선다. 걱정과는 달리 선생님의 목소리에선 차분함이 묻어나왔다. 입가엔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맞이한다.

자리에 앉는다. 쿠션감이 좋은 안락한 등받이 의자에 앉으니 목, 어깨를 타고 흐르는 긴장이 누그러진다.
그러자 선생님께선 ‘지난 한 주 동안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보시겠어요?’ 라고 질문하신다.
질문 자체가 면접처럼 형식적이면서도 뭔가 답을 내려야할 것만 같은 강박이 들어섰지만, 선생님의 인자한 표정을 보니 그 긴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간 내가 겪은 상황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겪는 실망감이 하나 둘 쌓이고 그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했다고. 일을 하다가 실수가 이어지자 지적을 받고, 그 지적으로 인해 내 동료에게 피해를 줄까라는 걱정이 쌓일 대로 쌓였노라고..

선생님께선 그저 고개를 끄덕이시곤 나의 고민을 찬찬히 듣기 시작했다. 듣는 자세를 보고선 비로소 내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하루 잠을 잘 자는지,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는지에 대한 생활 패턴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후에 있을 스트레스와 불안정도 그리고 우울 검사지로 점수를 측정하며 치료를 진행하시기로 말씀하셨다.

다시 원장선생님 방문을 나선 후, 접수처에서 검사지를 받는다. 본인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 상태를 하나 둘 체크하기 시작했다. 제출까지 마무리하니 시간은 10분이 지나있었다.

나의 검사 결과를 받은 원장님께서는 내 불안 수치가 높고 우울 단계가 2~3단계로 높은 상태라고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의지만으로 도저히 회복이 안되는 단계였다. 혼자서 힘 내보자고 애써 외쳐보고, 속으로 다독여보아도 의지가 생겨나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약의 처방을 받아야한다는 말씀도 덧붙여 설명하셨다.

나의 감정이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수치로 기록되자 글로도 전부 풀어쓰기 힘든 일이 단 두 자릿수에 압축된다. 경험 속에 섞여 제대로 못 본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간극이 얼만큼인지를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업무 특성상 병원에서 제공하는 기존약은 복용하면 졸음이 밀려오기에 일을 병행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씀 드리자 결국 수면제대신 브린테릭스 5mg 1주일 분 처분받는 것으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약 이름이 문득 궁금하다가 예전에 읽은 구정인 작가님의 책, <기분이 없는 기분> 속 주인공 혜진이 처방받은 것과 똑같은 약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핑크빛의 아주 작은 알약 하나가 봉지 하나에 담겨 있었다. 부작용이 적고, 효과는 좋은 약. 의지가 생겨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약이다.


완두콩보다 훨씬 작은 이 알약이 내 몸에 들어와 머리를 어떻게 헤집고 다닐 지 궁금하기도 한데, 역시 책은 누군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산물. 책 속의 주인공(혜진)은 간신히 기운을 차려 아이를 돌보고 식사를 하며 삶을 살아갔으니 나에게도 일말의 희망은 있겠지라는 생각도 든 건 사실이다. 허나 이 약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임을 알기에 너무 섣부른 낙관보다 무덤덤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약만 먹는다고하여 증상이 100% 치료가 되지는 않지요. 다만 약을 먹는 진짜 이유가 치료 목적도 있지만, 먹는 동안 진짜 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진짜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결국 나임을 알지만, 어떻게 나를 돕고 아껴줄 지에 대해선 미처 생각하지 못하며 하루를 살아온 나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내가 원하는 것, 나를 아껴줄 수 있는 것을 등한시 한 채, 그저 주어진 일에만 매달린 채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마음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일로 저장공간이차서 숨 쉴 여유조차 없다고 sos 신호를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혹독하게 매질하고, 냉소적으로 대했구나.

176p. 우리 목표가 약을 끊는 것은 아니잖아요? 잘 지내는 것. 그게 우리 목표예요.
-구정인, <기분이 없는 기분> 중

그래. 잘 지내야한다. 이 일이 좋아서 뛰어들었다면, 내가 잘 지내야만 지속할 수 있다. 아파도 이 일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나를 챙겨서라도 이어가야만한다.

일을 하면서 발생하는 사건들, 고객들의 무례한 태도, 정리한 지 10분도 안되어 엉망진창 상태가 되어버리는 서가, 슬로프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발소리, 장난치는 소리 등등. 나를 괴롭히는 외부 요소들은 이 서점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평생 유효하다. 외부 요소를 100% 바꾸기엔 현실적인 제약이 많으므로 그것들에 실망하고 자책하는 빈도를 줄이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니까.

앞으로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갈 듯 하다. 약으로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다면, 진짜 내 마음이 어디까지가 진짜일지 증상이 어디까지일지(p.178) 궁금하기도 하다.

-끝-

(덧, 약효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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