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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배신 그리고 르네의 총상

하인리히의 진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다

by 구시안


인간의 배신은 신뢰라는 가느다란 실을 매달고 서 있는 두 존재가 끝내 서로를 붙잡지 못할 때 일어나는 조용한 붕괴 같은 것입니다. 신뢰와 의리라는 가치 위에서 오래도록 함께 움직이던 무리 안에서도 균열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요. 배신은 단순한 잘못을 넘어 관계의 심지를 뒤흔드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믿는 순간에도 이미 내부를 천천히 허물어뜨립니다.



인간은 흔히 배신 앞에서 한 사람의 도덕적 결함을 먼저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악의, 혹은 의지적 파괴를 상상하며 마음 한편을 단단히 세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더 깊이 내려가 보면, 배신은 개인의 잘못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인간 존재가 본디 품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에서 자라난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취약성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각자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하고, 결국 홀로 선 몸을 긴 침묵 속으로 떠밀어 넣지요. 그러면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고, 상대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때로는 증오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그림자로 변해갑니다. 마치 빠져나오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깊은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 돌아설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진흙의 차가운 밀도처럼 말입니다. 배신은 타인의 행위에서 시작되지만, 상처의 무게는 결국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고독의 층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늪을 걸어 나오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일과도 같습니다.



배신의 흔적은 오래 남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인간이 가진 가장 연약한 지점과, 그 연약함을 견디며 살아내는 힘이 동시에 드러나지요. 배신은 인간의 비열함보다도 인간의 두려움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그 두려움이 생존을 향한 본능으로 변하며, 그 과정에서 타인이 희생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배신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기도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압력과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 어떤 공포 속에서 어떤 선택을 강요받았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하지요. 인간은 강인해 보일 때조차 주변의 구조와 분위기에 크게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배신은 악의보다,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된 필연적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치 당신에게 보이지 않는 저처럼 말이지요.



그럼에도 배신은 인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타인이 나를 버린 사실만이 아니라, 그 순간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연약함 속에서도 누군가는 끝내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간을 다시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요.



부헨발트에 내리기 시작한 비는 쉽게 그칠 기세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마치 이미 정해진 순서처럼 흐르고 있었지요. 신의 눈물이 안개를 뚫고 흐리기 시작할 무렵, 사라져가는 햇빛 한 점이 아쉬웠던 아침이 지나 어두운 밤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배신은 인간을 절망시키면서도 인간을 이해하게 만드는 양가적인 경험입니다. 누군가의 배신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용서까지. 그 모든 감정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배신은 인간의 상처이면서 동시에 인간다움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가라앉은 부헨발트의 새벽, 햇빛이 남긴 마지막 온도조차 사라지고 사물들은 각자의 무게만 남긴 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하인리히는 철창 너머로 르네를 불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과 결심이 뒤섞여 있었고,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에서 긴장감이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르네. 계획이 바뀌었어. 시간이 얼마 없어.”

갑작스러운 말에 르네는 숨을 들이켰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왜.... 정말 가능한 거예요? 감시가 두 배로 늘었는데,”

하인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말했다.

“그레타의 편지를 받았어. 움직여야 해. 내일 새벽, 경비대 교대 시간에 삼십 분 정도 틈이 생겨. 그 순간을 놓치면 다시 기회가 없을 거야.”

“....알겠어요, 하인리히.”



르네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부헨발트에 끌려온 뒤 처음으로 희미한 희망이 보였지요. 그러나 그 희망 속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날카로운 진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르네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인리히는 그레타의 편지를 읽으며 점점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레타의 편지는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지요. 사랑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묘한 기적이었습니다. 하인리히는 그녀와 아이, 그리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르네까지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탈출 노선을 며칠 동안이나 빈틈없이 마련해 두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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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6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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