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림자는 남았고,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다

르네의 절망이 피어 오르다

by 구시안

어둠이 감방의 틈새를 타고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벽에 기대어 앉은 르네의 곧게 마른 숨을 지켜보고 있었지요. 투명한 몸을 가진 제게 감정이란 원래 스쳐가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르네의 분노는 단순한 인간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감방 안을 천천히 기어 다니며, 차가운 돌을 더 차갑게 만들고, 죽음조차 움츠러들게 만드는 묵직한 기운이었지요.



분노는 인간을 집어삼키는 불꽃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오래 지켜봐 왔습니다. 분노란, 오히려 아무 소리 없이 가라앉는 어두운 물과도 같습니다. 한 겹, 또 한 겹 본인의 마음을 덮어버리며, 끝내 스스로가 어디까지 잠겨 있는지도 잊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거대한 침묵이지요.



르네의 분노는 그레타가 아닌 하인리히에게서 비롯됐습니다. 그의 죽음이 남긴 자리는 너무 허무했고, 그 빈자리가 그대로 르네 마음속으로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 파문이 그녀의 전신을 흔들자, 고통은 더 이상 상처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존재 자체를 흔들기 시작했지요.



저는 그런 인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쟁을 겪으며 분노가 심장을 잠식해 폐허가 된 사람들. 배신을 당한 뒤 분노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던 사람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며 스스로를 짓눌러 결국 무너져 내린 사람들까지.



르네의 분노는 아직 그 단계에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보였습니다.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는 검은 그림자가. 그 그림자는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깨어날 때 드리워지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치닫는 감정이자, 동시에 인간을 무너뜨리는 감정.



그림자는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왜 나였는가.
왜 하인리히였는가.
왜 그레타였는가.

그 질문들은 사라진 영혼들이 자주 묻던 것과 똑같았습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간 이들이 남기던 미련과 비슷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지요. 저는 그 울림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분노는 결국 방향을 찾습니다. 그 방향이 구원으로 향할지, 파괴로 향할지는 인간 스스로의 몫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절망 속에서 후자를 선택하곤 하지요.



르네의 눈이 천천히 떠졌습니다. 고통으로 흐릿해진 시선 속에서도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체념도, 두려움도 아닌, 불타지 않는 불과도 같은, 차갑게 응고된 분노의 형상이었습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구시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6일째 거주중입니다.

45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94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1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2화그레타의 배신 그리고 르네의 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