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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터스베르크의 숲을 지나 미군을 만난 르네

르네의 숲을 향하는 발걸음

by 구시안

르네가 철조망 아래를 빠져나오던 순간, 세계는 조용히 뒤집히고 있었습니다. 부헨발트의 공기는 여전히 피비린내와 금속 냄새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 너머의 숲은 다른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향한 숨, 그 오래 잊혀 있던 감각이었습니다. 그녀의 다리는 형체를 잃은 통증으로 울부짖었지만, 지금은 고통조차도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같았습니다.

“살아라.”
그것이 고통의 유일한 언어였지요.



부헨발트 수용소는 독일 튀링겐주의 에트터스베르크(Ettersberg) 언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르네는 그 언덕의 등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몸을 끌 듯 움직였습니다. 에트터스베르크 숲을 지나는 르네의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가 굽어 있었고, 겨울의 끝자락을 버티지 못해 껍질이 벗겨진 채 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숲도 늙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그녀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걸었습니다. 한 걸음마다 심장이 멈추고 다시 뛰는 듯한 통증이 있었지만, 숲의 어둠은 그녀를 삼키지 않았습니다. 그레타가 남긴 묵음의 발자국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길처럼 그녀의 앞을 열어주고 있었으니까요. 에터스베르크 숲은 독일 바이마르 북쪽에 우뚝 솟은, 낮지만 묵직한 산맥의 한 갈래입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숲이지만 수령이 오래된 떡갈나무와 너도밤나무가 계절의 이행에 따라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바람은 나뭇잎 사이로 다정한 듯 스산하게 흐르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숲에는 보이지 않는 층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빛이 닿지 않는 내면의 지층이, 인간이 남긴 잔혹의 무게를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는 장소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나무들이 기울어 선 채로 벌써 수십 년의 바람을 받았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짙다. 마치 아직도 땅속 깊은 곳에서 미처 사라지지 못한 목소리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처럼. 사람의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는 숲길에서는, 흙냄새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느껴지고 있었지요. 그것은 자연의 침묵이라기보다, 무언가를 오래도록 듣고도 말하지 않는 존재의 침묵에 가까웠습니다.



에터스베르크의 하늘은 르네의 얇은 피부처럼 유난히 투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투명함이 오히려 더 잔혹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숲은 부드럽게 넘실거리지만, 그 아래에는 인간이 남긴 균열과 상처가 겹겹이 쌓여 있었지요. 이 숲을 지나가는 바람은 흔히 벗겨낼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을 끌고 다니며, 나뭇잎의 뒷면에 스쳐간 뒤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듯 이 숲의 기운은 묘한 것이었습니다.



숲은 그것들을 숨기지도 않고, 완전히 드러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묵묵히, 오래도록 놓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숲을 ‘고요하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에터스베르크의 고요는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요는 바람이 멈춘 시간의 빈틈이 아니라, 인간의 잔해가 자연 속으로 천천히 흩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침잠된 숨소리 같은 고요였지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무들 사이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발자국의 감각이 미세한 돌멩이 하나처럼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은 푸르고 아름답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전쟁을 겪지 않는 유일한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새들은 아침마다 가지 끝에서 울고, 햇빛은 나뭇가지 사이의 틈을 밀어내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 땅이 가진 잔혹한 기억과는 무관하다는 듯, 자연은 그 자체의 생명력을 계속해 이어간다 듯. 그러나 그 생명력조차 당당함보다는 조심스러운 회복에 가까워 보이는 것이었지요. 숲이 기억을 잊지 못한 채,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생의 미묘한 곡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터스베르크 숲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었습니다. 르네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보호막처럼 숲은 르네의 숨소리마저 삼키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인간이 저지른 가장 깊은 그림자가 가라앉아 있는 동시에, 그 그림자를 덮고 다시 싹을 틔우는 자연의 오랜 시간까지 함께 흐르는 이중의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숲을 걷는다는 것은, 과거의 숨소리와 현재의 호흡이 동시에 귓가에 스치는 것을 견디는 일이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흙과 바람과 빛의 결 속에서 얇은 층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결국 한 가지 사실에 닿는는 곳.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은 땅속에 남아 생의 모양을 바꾼다는 것. 그 자연의 섭리를 인간은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요. 당신의 숲은 숨을 쉬나요? 이곳 에터스베르크의 숲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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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5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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