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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유럽, 역사 위에서 이어지는 르네의 길

폐허 위에서 다시 숨을 배우는 사람들

by 구시안


아침 안개가 옅게 깔린 철조망 근처에서, 수용소 사람들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멀리서 들리던 엔진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낯선 문양이 새겨진 군용차량이 천천히 멈춰 섰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인사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놀라움과 안도,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이 섞여 있었지요. 수용소 사람들은 처음엔 주저했지만, 곧 누군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우리가.... 자유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사방에서 퍼져나갔습니다.



누군가는 떨리는 다리로 병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고, 누군가는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어 하늘만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자유는 거창한 장면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따뜻한 물 한 컵, 빵 한 조각, 오랜 시간 들리지 않던 친절한 말 한마디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그날, 무너진 건 철조망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붙어 있던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새로운 삶이 당장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날 아침, 세상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의 시간, 르네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밤새 거의 잠들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별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아픈 몸을 붙잡고 움직일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일어나야 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때때로 누워 있는 것조차 하나의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천막 안에는 다른 생존자들의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낮게 깨어드는 신음, 잠결의 울음, 혹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 전쟁 이후의 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침묵과 소리가 뒤엉킨 채, 서로를 위로하지 못하면서도 함께 버티는 시간.



르네는 천천히 천막 바깥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미군 병사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다가오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살짝 들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작은 몸짓 안에는 한 사람의 평생이 담긴 듯했습니다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온 세월, 그리고 다시 걸으려는 작은 의지.



바깥은 아직 푸른 어둠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땅은 차갑게 젖어 있었고, 공기에는 축축한 흙내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 냄새는 르네에게 어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수용소의 냄새와는 전혀 다른 냄새. 누군가가 갈아엎은 밭, 전쟁 전에 어린 시절 뛰어다니던 숲, 비 온 뒤의 고요. 그녀는 숨을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는 감각이 가슴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살아 있는 냄새네....”

그녀는 그렇게 중얼렀습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지만, 저는 그 말을 들었습니다. 투명한 제 몸은 그녀의 뒤에 있었다가, 어느새 옆에 있는 듯 따라붙었습니다. 그녀의 발 아래서 흙이 살짝 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는 비로소 삶의 세계로 돌아오는 첫 걸음 같았습니다. 너무 약하고 가늘어서, 금세 부서질 것 같은 발걸음. 그러나 부서지지 않은 채 땅 위에 남는 발자국이기도 했습니다.



병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에 젖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 잎은 거의 없었지만, 가지 끝에서 작은 싹이 아주 미세하게 솟아 있었습니다. 르네는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얼마나 천천히 자라나는지를, 그리고 그 느린 속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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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4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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