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기 위해 존재를 번역해야 했던 사람들
관계 속에서 언제나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무엇을 의도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바라지 않았는지까지. 설명은 처음엔 오해를 풀기 위한 도구지만, 반복되면 존재를 증명하는 노동이 된다. 말하지 않으면 오해받고, 말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설명은 점점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생존의 언어가 된다.
설명하는 쪽의 피로는 단순히 말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속에서 미리 자신을 펼쳐 보이는 행위에서 온다. 상대가 묻기 전에, 서운해하기 전에, 판단하기 전에 먼저 말해야 한다는 강박. 그 강박은 결국 이렇게 속삭인다.
“설명하지 않으면 너는 오해받을 것이다.”
이때 관계는 대칭을 잃는다.
한쪽은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한쪽은 이해받기 위해 애써야 한다. 설명하는 사람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발생한 그대로 느끼기보다, 설명 가능한 형태로 가공하기 시작한다.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정리해야 할 문서가 된다. 슬픔도, 분노도, 피로도 “그럴 만한 이유”를 갖춰야 허용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존재가 행위로 축소되는 순간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납득 가능한 나’가 된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인간은 객체가 된다고 말했지만, 설명하는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관리한다. 오해받지 않기 위해, 상처 주지 않기 위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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