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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언제 나를 배반하는가

내가 믿던 판단들이 흔들리는 순간들에 대하여

by 구시안



생각은 언제 나를 배반하는가.

그것은 생각이 틀렸을 때가 아니라, 너무 옳아졌을 때다. 생각이 하나의 방향으로 굳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때, 생각은 나의 편이기를 멈춘다. 그 순간부터 생각은 나를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나를 가두는 구조물이 된다. 나는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믿지만, 어느새 생각은 나를 대신해 세상을 결정하고, 판단하고, 차단한다. 배반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된다.



처음 생각은 질문이었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왜 이 감정이 반복되는지, 왜 이 삶이 나에게 맞지 않는지. 질문은 살아 있었고, 불안했으며, 열려 있었다. 그러나 질문이 반복되면 사람은 견디지 못한다. 인간은 불확실함보다 확실함을 선호한다. 그래서 질문은 점점 답으로 굳어진다. 이게 나야, 이건 내 성격이야, 세상은 원래 이런 거야. 그 순간 생각은 더 이상 나를 탐색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규정한다. 생각은 나를 설명해주는 대신, 나를 대신 살아주기 시작한다.



심리적으로 보면, 생각의 배반은 여전히 뻔뻔한 자기 방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생각을 만든다. 이해하면 덜 아프고, 해석하면 덜 흔들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생각은 상처를 덮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감각 자체를 마비시킨다. 느끼기 전에 판단하고, 아파오기 전에 이유를 붙이며, 슬퍼지기 전에 의미를 만든다. 그렇게 생각은 나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나를 둔감하게 만든다. 배반은 바로 그 둔감함의 이름이다.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생각은 나에게 너무 그럴듯한 문장을 제공한다.

나는 그 문장들을 통해 나 자신을 설명하고,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삶을 정리한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지나치게 매끄러워질수록, 나는 내 삶의 거친 표면을 잃는다. 생각이 만든 문장은 언제나 감정을 한 박자 늦게 데려온다. 그래서 나는 울어야 할 순간에 설명하고, 분노해야 할 순간에 분석하며, 떠나야 할 순간에 이해한다. 생각은 나를 성숙하게 보이게 만들지만, 동시에 나를 제때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철학적으로 생각의 배반은 주체와 사유의 위치가 바뀌는 순간에 발생한다.

나는 내가 생각을 하는 주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생각은 나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배한다. 나는 생각에 의해 허용된 감정만 느끼고, 생각이 승인한 선택만 한다. 생각은 기준이 되고, 나는 그 기준에 맞춰 자신을 검열한다. 그때 생각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생각은 권력이 된다. 그리고 그 권력은 언제나 자신을 정당화한다.



생각이 나를 배반하는 가장 명확한 순간은, 삶이 멈춰 있는데도 나는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을 때다.

관계가 죽어가는데도 나는 왜 괜찮은지 설명할 수 있고, 삶이 공허한데도 나는 왜 이 상태가 합리적인지 말할 수 있다. 그 설명들은 정확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명이 완벽해질수록, 삶은 점점 비어간다. 생각은 나에게 납득을 주는 대신, 생기를 빼앗는다.



배반은 또한 생각이 나를 안전한 자리로만 이끌 때 일어난다.

생각은 위험을 싫어한다. 실패를 계산하고, 상처를 예측하고, 고통을 회피한다. 그래서 생각은 늘 한 박자 늦은 용기를 허락한다. 조금 더 준비되면, 조금 더 확실해지면, 조금 더 안정되면. 그러나 삶은 그 조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게 미뤄진 선택들 사이에서, 나는 점점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생각은 나를 보호했지만, 동시에 나를 소외시켰다.



그렇다고 생각을 버릴 수는 없다. 생각은 여전히 필요하다.

문제는 생각을 절대화하는 태도다. 생각이 감각보다 앞서고, 감각을 교정하려 들 때, 생각은 폭력적이 된다. 진짜 사유는 오히려 생각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판단이 나를 살게 하는지, 아니면 편리하게 마비시키는지. 이 해석이 나를 드러내는지, 아니면 숨겨주는지. 생각은 질문받을 때만 다시 나의 편이 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 나를 배반하는 순간을 경계의 신호로 삼으려 한다.

지나치게 설명이 잘될 때, 모든 것이 납득될 때, 불편함이 사라졌을 때. 그때 나는 묻는다. 지금 나는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회피하고 있는가. 생각은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생각은 나를 배반한다.

그러나 그 배반은 적의 공격이 아니라, 도구가 주인을 넘어서려는 순간에 발생하는 사고에 가깝다. 그 사고를 자각할 수 있다면, 생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감각 뒤로, 삶 옆으로. 그때 비로소 나는 생각을 사용하면서도, 생각에 살지 않게 된다. 아마도 그 균형 위에서만, 사유는 다시 살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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