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것

끝내 말이 되지 못한 것들의 기록

by 구시안

검은 것은 사실 우아하지 않다. 향기도 없고 교훈도 없다. 검은 것은 살아남은 것들의 찌꺼기다. 끝까지 버려지지 못한 생각. 입 안에서 썩은 말. 아침까지 이어진 숙취 같은 기억. 검은 것은 위로하지 않는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고, 다들 그렇다고 넘어가지도 않는다. 도망친 자리마다 정확히 따라와 앉아 있다.


나는 검은 것을 정면으로 본 적이 없다. 대부분은 술잔 바닥에서 거울 속 눈동자에서 새벽 네 시의 부엌에서 옆모습으로만 마주쳤다. 검은 것은 폭발하지 않는다 대신 안쪽에서 오래 끓는다. 속도를 잃은 분노. 식어버린 사랑. 너무 늦게 이해한 진실. 사람들은 빛을 믿으라고 말하지만, 빛은 늘 바쁘다. 잠깐 비추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검은 것만이 끝까지 남아 결말을 지켜본다.


검은 것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그건 분명하다. 대신 나를 쉽게 살려두지도 않았다. 매일 조금씩 닳게 만들었다. 검은 것은 적이 아니라 증거라는 것을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잔인하지만, 정확한 기록같은 것이었다. 오늘도 검은 것은 내 곁에 있다. 미화되지 않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담배 연기처럼 천천히 폐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뱉지 않는다. 삼킨다. 이게 지금의 나이니까.


하늘은 검게 그을린 산처럼 서 있었다. 구름들은 능선을 이루듯 겹겹이 쌓여 도시 위에 드리워졌고, 그 무게는 눈으로 보이기보다 몸으로 먼저 느껴졌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가 거칠게 긁혔고, 강하게 부는 바람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건물과 골목 사이를 난폭하게 헤집고 다녔다. 마치 이 도시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하늘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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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73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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