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산책

by 구시안

저녁은 늘 조용히 무너진다. 해가 산등성이에 기대어 숨을 고르면, 하루는 아무 말 없이 스스로를 접는다. 바람이 부는 그 접힌 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의자, 특별할 것 없는 침묵. 그러나 침묵은 늘 사소한 것들을 크게 만든다. 컵 가장자리에 남은 미지근한 물자국, 창문에 남아 있던 손바닥 자국, 말하지 못한 문장의 그림자 같은 것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고들 말하지만, 저녁의 시간은 가끔 옆으로 흐른다. 기억과 기억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며,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을 다시 데려온다. 그 얼굴은 늘 조금 느리게 웃고, 조금 늦게 사라진다. 우리는 그 느림을 오해해 왔다. 느림은 미련이 아니라, 충분히 바라보려는 태도였다는 것을.


사람은 하루에 몇 번이나 자기 자신을 지나친다. 거울 앞에서, 이름을 불릴 때,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철렁 내려앉을 때. 그때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가장 용감한 나, 가장 비겁한 나, 그리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서 있는 나. 산다는 것은 그 셋이 번갈아가며 펜을 쥐는 일인지도 모른다.


눈이 오면 도시는 잠시 솔직해진다. 아스팔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는지 드러내고, 가로등은 빛을 과장하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도 마찬가지다. 우산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조금 더 쉽게 내준다. 비는 이유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를 묻지 않는 존재 앞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날은 말보다 숨이 필요하다. 설명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럴 때 마음은 오래된 책처럼 펼쳐진 채로 남아 있고, 바람은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그 정지의 순간에 우리는 알게 된다. 삶이 우리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너무 서둘러 읽어왔다는 사실을.


밤이 깊어지면 별은 자신이 빛난다는 것을 잊은 듯 가만히 있다. 빛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의 밤을 밝히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어둠을 견디는 것만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 그날의 우리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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