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밤의 언어 01화

이름이 풀린 세계에 대하여

이름이 풀린 세계에서 쏘는 언어의 화살

by 구시안

이 세계에서, 나는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부르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붙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린다.

길모퉁이의 고양이는 더 이상 ‘고양이’가 아니고, 바람은 ‘바람’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으면 기억의 표면 위로 떠오르는 이름들을 본다.

누군가를 부르고, 물건을 부르고, 시간을 부르는 일은 모두 허공 속에서 풀려나는 실타래 같다.

말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허망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고, 그저 냄새와 소리, 온기와 그림자로 서로를 알아본다.
사랑과 증오도, 기쁨과 분노도. 그 이름을 잃고 나면 한결 선명해진다.


그 감각만으로 충분히 서로를 알고, 세계를 느낀다.

이 세계에서 이름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고, 정의가 아니며, 소유의 표시도 아니다.
이름은 풀리고, 흘러, 오직 존재의 흔적만 남는다.
나는 그것을 보며, 세상 모든 것이 말보다 깊고, 말보다 가벼운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나는 속삭인다.
이름 없는 것들아, 나는 너희를 기억한다.
그리고 너희는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날카로운 화살이 되라고 유혹한다.




나의 이름 안에는 요정 따위는 없다.

공기에 흘러가는 나비.

동화 속 난쟁이도 없다.


나의 피는 붉게 타오르는 검붉은 작약꽃.

그 진홍색의 빛을 조각내어 흐르게 하는

피를 받치는 밤.

그것을 죽음과 번용에 받친다.

투명한 베일에 쌓아 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귀에 거슬리는 인간들의 외침에 받친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곳까지 들어가 버린 내면의 어떤 영역에 도달했지만,

비명을 지르고 있을 이들에게.

그곳에서 명상 말고는 무엇을 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어두운 녹슨 별들이 자리한 곳에서

공허에 대해 명상을 시작한 이들에게 받친다.


약간의 화려함을 더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맹세컨대.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1도 필요 없다.


인간의 이야기는 늘 비상사태나 참혹한 사건 속에 혹은

재난 중에 벌어지는 일이니까.


고인이 되어

녹슨 별이 된 그 빛을 바라보면 알게 되는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며 속삭인다.

그것이 신의 거짓말 보다 훨씬 뛰어난 언어라며.




당신의 이름이 풀려 버리면

당신은 뛰어난 화자가 된다.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되는 것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글을 쓰면 된다.

어차피.

너무나도 외적이고 분명한 당신의 서술이 독자들을 침범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언어가

날카롭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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