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조건

진실하지 않은 문장들에 대한 본능적 거부

by 구시안

사상은 우아하지 않아도 고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아함이 부족할수록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경감된다. 세련되지 못한 힘은 그저 무거운 덩어리에 불과하다.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반대로 단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나에게 단어는 만질 수 있는 몸이길 바란다.

나에게만 보이는 세이렌처럼

구체화된 관능성이 나에게는 단어가 되었다.

꿈에도 관심이 없고

심지어 학문적으로도

솔직히,

문학적으로도 아무런 흥미가 없다 보니

내 안의 관능적 사상이 갖고 있는 욕망은

어휘의 운율을 만들어내거나

타인이 말하는 운율을 듣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멋지게 자신의 사상의 조건을 말하는 것을 한 참을 듣고 있었다. 그 멋지게 말하는 그 모든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온몸의 핏줄에 개미가 기어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쓴 글을 읽을 때면 상상할 수 없는 행복으로 인한 숨죽인 경련 속에 실성할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을 보니, 나의 사상은 참으로 호불호가 정확하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글들은 문장 구성법이 얼마나 냉정하고 완벽한지 나는 감동보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무기력한 망상에 빠져 봄바람 앞의 나뭇가지처럼 새싹을 피우기 위해 몸을 떠는 가로수들의 몸짓처럼 떨고 있었다. 희열에 빠져 있는 사람의 만족도는 감히 타인이 상종할 수가 없는 지경인지라, 백일몽에 빠져 있는 사람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구석진 카페 앉아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생각하려는 욕구 없이 글을 쓰면서

가슴에 안은 조금은 따뜻해진

봄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에 몸을 맞긴 채

단어들이 나를 달래게 놔두는 시간을 갖는다.


단어들은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을 만들고

문장은 내가 느낄 수 있는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다가,

잠시 어떤 시냇가 정도의 웅덩이에서

작은 물길이 서로 섞어 듯

원래의 모습을 잃고

다른 문장이 되고 다시 이어지는 현상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얼룩지고 혼란스럽고

가물거리는 상상의 달빛 아래로

후줄근한 잠옷 정도에 스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행렬처럼

그저

나를 통과하고 지나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유명한 산문을 처음 읽었을 때가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혼란에 빠진 나에게 마치 전율을 느끼게 하며 음악보다는, 글이 더 사람을 사상가로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조건을 말보다는 글에 유념을 두기로 결정하고 나서부터 시작된 이 짓거리가 나는 편안해진 것 뿐이다.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

글을 읽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소리가 주는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의 색채를 떠올리는 일 보다

명쾌하고

장엄한 언어의 경검한 움직임이

어쩌면 나에게는 꼭 들어맞는 단어를 써서

찾아와 주는 선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상이 부르는

정치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마치 강렬한 정치적 열정처럼

느껴져서도 안 될 것이다.


내가 그리워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라,

살아오며 그 순간 느꼈던 감동에 대한

그리움 정도로

위대하지도

뜨겁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정확한 언어의 조화를 생전 처음

맛보는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두 번 다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렇게 글을 써 가야 한다라는 마음을

다시 잡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정치적

사회적인 감성이 전혀 없다.

한 가지가 있다면

나는 아주 우월한 애국적 감성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상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작가를 싫어한다.

내가 정말 혐오하는 것

내가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증오로서 미워하는 것이다.

문장론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철자를 잘못 쓰는 사람들도 아니겠으나

나는 글이 잘못 쓰인 종이 자체를

마치 사람인 양 증오하고 있다.

철자법도 인격이기 되는 곳이기에

문학의 세계는 사상가들로 가득 차 있다.


누가 뱉었는지

상관없이

나를 매스껍게 만드는

가래침 같은 오늘 같은 만남은 없기를 바란다.

적어도

서로가 가장 비슷한

감성의 추적자를 만나고 싶다.

단어는 보이고

들릴 때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르시스에 빠진 사람의 사상의 조건을

알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로마 알파벳의 호화로움을 간직하고

왕실의 가운을 입혀

과거로 돌려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예술의 역할이

사상가의 조건이 붙어야 한다면

단 하나다.


내가 느끼는 바를 타인들도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느끼게 하는 것.

개별성을 제공하여

이를 통해

타인들이 스스로에게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

진정한 실체는

절대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힘든 것처럼.

나의 느낌이 심오할수록 소통은

더욱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며

나의 감정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나의 사상의 조건을 달라면

나는 그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국 해야 하는 일은

나의 느낌의 진정한 본질을

다소 왜곡하더라도

나의 감정을 전형적인 인간 감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것은 늘 집중력을 떨어 뜨리고

개념을 구체적으로 풀어보는 간단하지 않은

번역을 해야 하지만,

나는 그 추상적인 것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 중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로 인해

삶에 관한 모호한 슬픔과 마음을

어지럽고 불안하게 만드는 근심이 찾아와

마음을 누르기도 하지만,

글이 내 심정에 더 적절하게

들어맞을수록

고유한 감정을 잘 드러낼 것이고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것은 줄어들 것이지만,

소통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느끼는 편이 더 옳은 일이다.


거짓말이란

사상의 조건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꿈꾸고 싶다는 다른 이들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도

덕목이겠으나,

유치하고 자발적인 거짓말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말이란

간단히 말해서 영혼의 이상적인 언어다.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음절이 결합된 결과인 단어들이

순간은 통할지 모르겠으나,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생각의 미묘하고

내밀한 움직임을 가진

사실적인 언어가 될 수 없다는

나의 사상의 조건을 걸어 두는 것이

지금의 할 일처럼 느껴진다.


꾸며내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미소와 밝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대할 때면

상대에게도

사상의 조건이 붙어 있음을 알게 된다.


모든 애정이 표면적으로 아름다우면 좋겠으나,

나에게는 그런 심장이 없다.

나는 언제나 진실함이 이긴다는

사실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사상가라는 사실을 각인하는 날이다.


나는 불현듯 황당하긴 하지만

타당한 감정을 느꼈다.

섬광이 스치듯 아무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코

아무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는 누구를 숭배할

사상의 조건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월,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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