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붉은 작약의 밤

허위를 향해 자라는 방랑의 내면에 핀 꽃

by 구시안


방랑의 다년초가

여전히 자라는 중이라

나에게 스스로

연설을 하는 가운데

하나를 잡아주려 애쓰고 있다.

마음이라는 것.


쓸모없는 맹세나 약속을

끊어주는

한 송이

작약 꽃을 피우며 노래들을

깨부수었던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먼저 말해줬다면,

그리고 지금의 눈이 아닌

주위를 감싸고 있는 먼지에게 말했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녹슨 별들에 전염되어

습지에서 피어난

검붉은 작약꽃이

두 덩이의 모래에 감싸져

사방의 바람을 맞으며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주는 밤.


기도에 대항하는

또 다른 기도를 위해

몸을 굽히진 않았다.


생각의 아가미 옆에 자리한

공기방울들이

꿈의 금단의 틈에서

시간들에서 나와

동그랗게 방울질 하고 있다.

검은 비단으로 덮인 어디에도 없음이

작은 빗줄기에 기대어 있다.


밤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고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밤이 찾아오면

모래 밑에서

엿듣지 않고

잠자는 뇌가

얻어낼 수 있는 하나의 꿈이

이미 시작된 또 다른

하루를 조정한다.


밝아질 것을 꿈꾸지만,

검은 비단으로 둘러 쌓인 대지를

벗어나기란 어려워

지나치게 키워진 것을

그 무거운 것을,

나에게 스스로 주는 것이다.

세상을 삼킨 그림자가 스치고 나서야

비로소

밤은 내 입을 만들어준다.


신중한 것과 함께

시간의 뜰에서 주위를

빙 둘러 핀

피어 있는지도 몰랐던

작약꽃이 이렇게

많이 피어 있다는 사실을

침묵에 미쳐 있던 것이

별로 드리워

그 꽃밭을 별로 드리운다.


호출음을 내던 작약꽃의 줄기에

장미나 간직하고 있을 법한

날카로운 가시가

요람을 지나

올라가는 밤.


시간의 기록이

난무한 세상

어느 조용한 곳에서

광기에 굳건한 시간에

몸을 맞긴다.


또 다른 별의 부화를

바라보고

느끼는


나는 여전히

허위를 찾고 있다.

모든 잠의 형상

그 언어의 그림자 속에

파묻히다.





슈베르트: 마왕, D.328 [피셔-디스카우/무어] (괴테)

밤의 일곱 시간.

침묵의 화려함을 머리들에

말들의 구걸은 발끝에 두고 앉아

듣는

번득이는 마왕을 마주합니다.

그런 밤.

아무렇지도 않은 밤.


이름: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

출생–사망: 1925년 ~ 2012년

국적: 독일

성부: 바리톤


지적인 음악가라고 찬양받을 만한 성악가입니다.

그는 특히 독일 가곡(리트)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란츠 슈베르트의 작품을 깊이 있게 해석했습니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시(詩)를 ‘연기’하고 ‘해석’하는 수준

음악이 글과 다를 이유는 없습니다.

고전이 현대적인 감각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끔씩 찾아보는 그의 목소리에서

찾아봅니다.


100년 전 태어난 그를

흑백으로 나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성악가의 목소리를

듣는 밤.


다른 시대의 살았던 목소리가

내뱉는 시(詩)의 해석을 남겨보며.




월, 목, 금 연재
이전 17화헤엄치는 빗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