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이야기-202202
*이 글은 천도교인들의 단톡방인 <안심정기>에 올린 글입니다.[202203.11~13]
1.
(1-起)
오늘날 대한민국은 ‘지방소멸’ 시대를 진행형 또는 완료형으로 건너고 있습니다. ‘지방소멸’은 인구감소로, 한 지역(면, 군)의 인구가 일정 숫자 이하가 되고 평균연령이 정도를 넘어서면, 국가 또는 광역지자체가 그 지역 잔여 인구를 한곳에 모아서 케어(요양원)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재정 면에서나 당사자의 삶의 질 향상(유지)을 위해 더 바람직하게 되는 순간 일어납니다. 이와 유사하게 ‘직업소멸’도 다각도로 진행형 또는 완료형으로 일어납니다(정부는 ‘직업전환교육’ 실시).
(2-承)
오늘, 천도교는 거의 정확하게 그 ‘지방소멸’ 또는 ‘직업소멸’의 경로를 걸어가고 있습니다(제 주관입니다). 시일식을 4주 모두 봉행하지 못하는 교구가 늘어난 지 오래이며, 참석 교인 숫자가 달마다 줄어들며, 평균연령이 해마다 고령화되고 있는 반면, 40대 이하 교인은 “0”에 수렴해 가는 현실이야말로 소멸의 분명한 징조입니다. 그래도 많은 교인들이 집에서 9시기도식을 봉행하고, 성미를 납부(?)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도가 댁 자제들이 아직은 많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일정 숫자(밀도, 존재감) 이하가 되면, 천도교의 역사와 기능은 다른 교단 또는 단체(기구, 조직, 사회적 활동)가 감당하게 되면서, 남은 천도교인은 ‘투명인간’이 되고, ‘천도교’는 문자 그대로 ‘역사 속의 이름’으로만 남게 될 수 있습니다.(ex. ‘3.1운동100주년기념관’ 대신 ‘임시정부100주년기념관’이 들어선 것) 이미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천도교는 잊힌 종교가 되고 말았지요[바로 며칠 전에도 대교당을 방문한 어떤 사람으로부터 “어머, 저는 천도교가 3.1운동 직후에 없어진 줄 알았어요! 신기하다! 아직도 있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3-轉-1) 이러한 현상적 측면은 물론이고 ‘질적’ 측면에서도 소멸 징후는 뚜렷합니다. 교헌과 규정이 다반사로 무시되며, 갈등 끝에 사회법까지 나아가는 것이 필수 코스(?)가 된 것 등이 그것입니다. 앞서 말한 ‘존재감’ 측면에서도 천도교는 ‘없는 것과 같은’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ex. 대통령 방북 수행 종교수장 4인에서 배제, 국장(國葬)시 ‘4대종교(기독, 천주, 불교, 원불)’에서 배제. ‘국가 의전 차원’에서 천도교는 이미 ‘소멸’]
(3-轉-2) 이 문제는 단 한 가지 사항이 해결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훌륭한 교령 또는 교역자’ ‘튼튼한 재정’ ‘훌륭한 교헌’ 등 그 어떤 대안도 ‘소멸되는 천도교’를 돌이키는 “제1처방”은 아닙니다. 유일하고 유효한 처방은 바로 40대(30대?) 이하 교인 숫자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신(新)포덕이건 도가 자제건 간에 40대(30대) 이하 교인이 교당에 나오고 주체적인 교인으로 자리 잡지 못하면, 10년 후 혹은 20년 후에라도 일어날 ‘소멸’을 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4-結) ‘결’(대안) 하나를 예시(例示)합니다. 수운회관 내에 40대(30대?) 이하 교인 전용공간을 마련합시다. 40대(30대?) 이하 교인들만 이용할 수 있으며, 그들이 한번 이용하면 다음에 꼭 다시 방문하여 이용하고 싶은 공간과 프로그램을 마련합시다. 이 일은 총부 교역자나 50대 이상의 교인이 주도할 일이 아니라 40대 이하의 사람들이 주도하게 하고, 50대 이상의 교인과 교역자, 총부 등은 오직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기만 합시다.[세대별로 순차적으로] 지금 50대 이상 교인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설교도 해서, 천도교 소멸을 저지-지연하거나, 젊은 교인들을 다시 모을 수 있을 것으로 절대로 오인하지 맙시다. 40대 이하 교인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 그것이 50대 이상 교인의 역할입니다. 그것이 내(50대 이상 교인)가 살고, 천도교회가 살고, 한울님과 스승님이 사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것(40대 이하 교인)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어떠신가요?
추신: 50대 이상 ‘선배’나 ‘어른’ 중에 기댈 만한, 본받을 만한 분이 없다면, 40대 이하 교인들이 ‘비빌 언덕’이 없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로지 40대 이하 교인들의 비빌 언덕이 될 만큼 존경스러운 선배, 어린이 되도록 自守, 自修, 自授합시다. 수운회관 대신 지역의 다른 공간/토지/시설을 기반으로 이 일이 추진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ex-방정환어린이집]
2.
‘천도교 소멸’이라는 말과 담론을 두고, “천도교가 큰 위기에 봉착했다. 큰 문제다”라고 느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천도교는 문제없다. 곧 봄이 오니, 씨 뿌릴 준비를 하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천도교는 문제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1) 첫째, 현대사회에서는 천도교뿐만 아니라 이른바 ‘4대종교’도 급격한 신도 수 감소, 노령화와 청년-학생-어린이 수 감소 등의 문제를 호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도교의 일부 교구가 휴무에 들어가는 것처럼 많은 교회가 문을 닫거나 성당이 정상적인 미사를 봉전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최근의 교단 내 여러 갈등과 몰염치(沒廉恥)의 만연을 두고 걱정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제가 교단 역사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천도교만 이런 문제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른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정부)는 또 오죽합니까?
(2) 둘째, 오늘의 시대가 일반적으로 ‘탈종교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시대에 종교는 기본적인 기능(‘예배’와 ‘수양’) 외에도 세계관(창조론), 인간관, 통과의례, 사후처리 등의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교육(사회화), 복지(봉사, 복지시설 운영), 교육(학교운영), 공동체 유지(교류협력)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중 대부분의 기능은 과학(세계관, 인간관 등)이나 사회제도(병원, 예식장, 장례식장), 학교, 복지시설, 시민사회 등에서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천적으로 종교 고유 영역은 이전에 비하여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사회에 거대 종교가 수백만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규모 교회, 사찰(이것은 역사가 더 오래되었지만), 관련 기관(학교, 복지기관, 영리기관, 다양한 법인 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실은 종교 고유(?) 기능(진리 탐구와 신앙, 수양)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측면에서의 세력을 유지 확장하는 ‘세속(정치경제)적인 측면’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전통적이며 넓은 의미의 종교’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정치~문화’ 측면 역시 종교 활동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만, (순수)종교적 측면만으로는 더 이상 그러한 영역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며, 이에 따른 부작용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한국사회의 특유한 근대사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종교 세력을 배경으로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고, 이를 매개로 하여 종교계(기독/천주/불교/원불교)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일이 뿌리 깊게 고착화되어 있어서, (4대)종교 쇠락은 자연스러운 경로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cf. 가장 최근, 정청래 국회의원의 발언-사찰 입장료와 봉이 김선달-을 빌미로 한 불교계의 ‘승려대회’ 망발]
(3) 셋째, 이 세상 어떤 유기체나 조직도 모두 생로병사-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3대(불교-천주-기독) 종교도 긴 역사 내내 수많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에 도달해 있고, 우리 천도교만 해도 160년 역사 안에서 몇 차례의 흥망성쇠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이 ‘흥’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 자체가 “문제”라거나, 돌이킬 수 없는 사태는 아닌 것입니다. ‘소멸=죽음’으로 본다고 해도, 한 그루 소나무가 죽는다고 해서 소나무가 멸종하는 것은 아니며, 소나무가 멸종한다고 해도 ‘나무’ 전체가 멸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나무가 고사하기 전에 수많은 솔씨가 뿌려져 더 넓게 퍼져나가는 것이며, 그 밖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4) 이렇게 보면, “곧 봄이 오니, 씨 뿌릴 준비를 하자”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현재의 ‘천도교 소멸’ 현상을 사실이라고 간주해도, 그것은 한때의 천도교일 뿐, “새로운 천도교”의 싹은 얼마든지 틔우고 성장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소멸이 문제(trouble, problem)가 아니라, 씨 뿌리고 싹을 틔우는 일이 문제(question)인 것입니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말씀이 있습니다. 문제를 잘못 파악하면, 시험점수는 ‘폭망’하겠지요. 그 말은 문제만 잘 파악하면, 답은 얼마든지 써 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문제(question)을 발견하고, 그 풀이를 찾기 머리를 맞대는 중입니다. ‘Chondogyo have No proble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