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회월보강독]
출전 [천도교회월보] 제3호, 1910.10, 5~8쪽
글쓴이 - 이관李瓘 / 현대어역 - 조성환.박길수 // 수록 -[다시개벽] 제4호(2021년 가을호)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학문을 지칭하는가? ‘철’이라는 글자의 이면에 지극한[盡美] 의미[意想]를 포함하고 있는지라. 대저 그 학문이 사상의 법칙을 일러주며 사물의 원리를 설명하니, 사상이 미치는 곳과 사물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 어느 것이 철학이 없으리오. 그래서 정법(政法)의 원리를 논하면 정법철학(政法哲學)이 있으며, 사회원리를 논하면 사회철학이 있으며, 도덕원리를 논하면 윤리철학이 있으며, 종교원리를 논하면 종교철학이 있으며, 논리의 법칙을 정하면 논리철학이 있으며, 심리의 법칙을 정하면 심리철학이 있어서, 역사와 문학과 교육에 이르러도 철학이 있지 않은 것이 없는지라. 더 미루어 나가 보면 백과(百科)의 학문이 철학의 법칙에 기초하지 않는 것이 어찌 있으리오.
그 학문에 두 가지 학파가 있으니, 하나는 유물파(惟物派)요 하나는 유심파(惟心派)라. 유물파는 말한다: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 세상의 모든 사물의 원리와 원칙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세세하게 탐구하여 원리 중의 원리와 원칙 중의 원칙을 드러내는지라. 이로써 유물론(惟物論)이 일어나니 그 학문을 조성하는 실적(實迹)과 민지(民智)를 개발하는 능력이 세계의 문명을 꾸며내며 개인의 생활을 보유하게 하나니, 이는 유물파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유심파는 말한다: “심성(心性) 밖에는 세계가 없는지라. 세상의 어떠한 사업과 어떠한 도리가 심성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겠는가. 양심(良心)은 곧 리(理)이다. 양심으로 어버이를 섬기면 자연히 효도를 이룰 것이요, 양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자연히 애정이 생길 것이요, 그 외의 일에 응하는 것과 사물에 접하는 것이 양심이 아닌 것[非心]에 이끌리지 않고 순연히 양심을 쓰면 천리와 합치되고 인의(仁義)에 들어맞는지라. 이로써 유심론(惟心論)이 생겨나니, 그것이 사람과 만물을 만들어 내는 방침과 본원을 직간(直看)하는 혜안(慧眼)이 인
도상(人道上) 정의를 세우며 지행합일을 제창하니, 이는 유심파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학파의 학설이 바른 견해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물파는) 물질의 다양성[萬殊處]에 나아가서 각각 깊이 연구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며, (유심파는) 심지(心地)의 집중을[主一] 향해 홀로 마음을 다잡는 것이 높은 경지에 이르니, 비유컨대 유물자(惟物者)의 논리는 봄 들녘에 가득한 새싹들이 불긋불긋하고 푸릇푸릇한[紅紅綠綠] 것이 각각 태극이 아님이 없으나[無非分子太極], 일홍(一紅)과 일록(一綠)의 태극은 본다고 하겠지만 홍록(紅綠)의 전체 태극[統體太極]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할 것이다. 유심자(惟心者)의 주장은 하나의 거울[一鑑]을 견지하여 만상(萬相)을 비추면 만상의 미추(美醜)가 이 거울을 벗어날 수 없으니 나의 하나의 거울로 자족(自足)하다고 말하고, 인상(人相)과 중상(衆相)에도 각각 하나의 거울[一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니, 두 학파의 학설이 모두 한쪽에 치우침을 면할 수 없도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信仰)을 종(宗)이라고 하고 전도(傳道)를 교(敎)하고 하니, 그 기능을 논하면 사람의 마음[心界]으로 주관을 삼으며 물질[物界]로 객관으로 삼아서, 주관자의 생각[意想]으로 어떤 대상[一物]을 지정하여 신앙을 의탁하되, 이 대상이 우리의 지극한 소원을 실현시켜 준다고 생각하여 나의 수명(壽命)도 이에 달려 있으며, 나의 복록도 이에 달려 있으며, 이 대상이 나에게 예언을 알려 주어 나의 앞길과 세상의 장래를 환하게 미리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간구(懇求)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발원(發願)하여 일분일초도 쉼이 없으면, 주체의 정성의 근력이 객체의 감응선을 서로 맞이하는지라. 짐승과 물고기도 알을 낳을 수 있으며 목석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이적(異迹)이 나타나니, 그 효과는 자기만 누릴 뿐 아니라 그 감화력이 중생을 이끌어서 자기와 같은 신앙을 갖게 할 수 있으면 자기와 같은 복록을 얻는다고 하니, 이에 한 사람이 따르고 두 사람이 믿어서 명척(冥隲)을 바라며 복전(福田)을 개척하되, 그 가르침을 주관하는[主敎] 사람의 기능 하에 귀명(歸命)하여 우러르는[所戴] 대상을 신앙하는지라.
그 정결한 계율을 지키고 천복(天福)을 닦음에 이를 보조하는 법칙이 있으니, 항상 머릿속에 한 분의 참된 주재자[一位眞司]가 의연히 임재하여 나의 행동을 모두 단속한다고 생각하며 나의 사상을 관조한다고 생각하여, 눈에 바르지 못한 것이 보이면 이 대상[一物]을 두려워하여 감히 보지 못하며, 귀에 바르지 못한 소리가 들리면, 이 대상을 두려워하여 감히 듣지 못하며, 입으로 이치에 어긋난 말을 내뱉지 않으며, 마음으로 법도에 어긋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부모를 섬김에 혹시라도 효도를 어길까, 임금과 스승을 섬김에 혹시라도 바른 길을 벗어날까, 동포(同胞)를 대함에 혹시라도 애정이 부족한가, 모두 이 대상의 단속과 제재를 받으니, 모든 마음[一心]이 법도[彀律] 안에서 세워지고 온 몸이 규칙을 따라 행동하여, 세상의 수많은 학술기예(學術技藝)가 다 이 문호를 따라 나오니, 종교는 문명의 어머니란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니로다.
종교가(宗敎家)는 흐릿한[迷夢] 이치를 믿으며 철학가(哲學家)는 드러난 상(相)을 주로 하나니, 리(理)란 형이상(形而上)의 대상[物]이라. 혜안(慧眼)으로는 자세히 알 수 있을지언정 육안(肉眼)으로는 보지 못할 것이요, 도심(道心)으로는 이해할지언정 인심(人心)으로는 엿보지 못할 것이라. 헤아려서 알 수 없는 가운데 희망할 수 없는 대상을 구하는 것이다. 상(相)은 형이하(形而下)의 대상이라. 모습과 형상을 통해서 원소를 탐구하며 성질을 분별하여 그 변화하는 정도에 마땅하게 할 것이다. 연구하는 가운데 예측을 하고 실제로 해 보는 데서 정점에 이르나니, 현상적인 것을 근거로 하는 사람이 흐릿한 것을 믿는 사람을 보면 “미신이다, 어리석다” 하고 매번 헐뜯겠지만, 흐릿한 가운데 지극한 정성이 생겨나고, 지극한 정성 가운데 조화가 나타나서, 세속의 얄팍한 생각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좋은 결과[善果]와, 경영하기 어려운 사업과, 공부하기 어려운 학술과, 바라기 어려운 신령한 이적[靈異] 또한 생겨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나니, “미신(迷信)이 곧 정신(正信)이라”는 말이 잘못된 말이 아니로다. 철학은 마침내 과학으로 전락하여 말류(末流)의 분쟁을 자초하나니, 문명의 정도가 극도에 달할수록 성신[誠信]의 근력은 박약해지는지라. 그러므로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인문(人文)을 혁신코자 할 때 종교의 자궁에서 잉태하지 않으면 결코 좋은 미래[善後]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노라.
[역자의 말]
이 글이 씌어진 시기는 '철학'이라는 말도 '종교'라는 말도 낯선 시기, 우리 사회에 막 정착되는 시기였다. 이때 이미 사회적으로 신 지식인(근대학문-개화파)들은 "종교는 미신"이라는 관념을 굳히고, '대 종교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 '종교'의 입장을 옹호하는 세력은 동아시아(동양) 문명을 압도한 서양문명의 근저에 '종교(기독교)'가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종교야말로 철학이 감당하지 못한 '더 깊은 영역'을 감당하는 진리 중의 진리라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는 직접 언급되지 않았으나, 천도교는 스스로를 "신(新)종교"로 자리매김하면서, 철학(과학)이 비판하는 전통의 종교, 관습의 종교의 말폐를 초월하는 종교 중의 종교, 종교 너머의 종교임을 자부하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동학 이래 (한국) 신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적인 인식이기는 하지만, 천도교는 그 점에 대해 이 <천도교회월보>를 통해 지속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읽게 될 <천도교회월보> 번역 기사들을 통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