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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12. 2022

인류세 시대의 생활개벽
-동학, 어떻게 할 것인가(2)

<<다시개벽>> 제6호(2022년 봄호) 권두언 RE: START

조성환 (편집위원)


작년 1월, ‘인류세(anthopocene)’ 개념을 널리 알린 네델란드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첸(Paul J. Crutzen, 1933~2021)이 세상을 떠났다. ‘인류세’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행위가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시대”라는 뜻이다. 한나 아렌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의 활동이 인간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시대”인 셈이다. 우리가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 하나하나, 플라스틱 하나하나가 우리의 생존 조건에 위협을 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류세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중용] 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행위를 삼가고 조심하는 ‘신행(愼行)’이 될 것이다. 동학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활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행(敬行)’이라 할 수 있고, 개벽파의 개념으로 말하면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생활개벽’이 될 것이다.


이번 동학 특집호에도 시민사회에서 동학을 매개로 삶의 양식을 개선하려고 하는 운동가들의 글을 모았다. 13명의 저자들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고 공무원도 있다. 디자이너도 있으며 대학원생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각자 자기 분야에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분들이다. 이런 분들의 행위와 활동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밑거름이 되리라 확신한다. 이런 주옥같은 글들을 [다시개벽]에 실을 수 있어서 행복할 따름이다.


먼저 <다시 뿌리다>에서는 동학을 하는 시민(侍民) 세 분의 목소리를 담았다. 하나같이 도시와 농촌에서 인문학의 씨를 뿌리는 실천가이다.


여성동학다큐소설 <비구름을 삼킨 하늘>의 저자 이상미의 {나대다, 유랑하다, 행동하다—어느 여성의 시민활동 성장기}는 제목에 나타난 그대로 일종의 ‘성장 에세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카프카의 [변신]의 동학 버전 같은 느낌이다. 아이의 건강 문제로 우연히 공주로 이사 와서, 그리고 동학을 만나서, 어떻게 자신이 평범한 주부에서 ‘행동하는 시민(侍民)’으로 변해 갔는지를 자기고백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공감하는 바가 컸다. 나도 원광대에 가서 동학과 개벽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원광대에서 식민도시+개벽도시 ‘익산’을 재발견했듯이, 저자도 ‘공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글은 일종의 ‘도시인문학’이자 ‘개벽문학’ 같은 느낌도 불러일으킨다. ‘공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전개하고 있는 여성운동, 어린이운동, 예술운동, 인문운동의 목적을 “그 어떤 이유로도 억압받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개벽 세상을 위해 함께 행동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열정과 이상이 곳곳에 배어있는 글이다.


시골에서 되살림운동을 하는 김은정의 {되살림: 천지마음을 그리워하는 re;design}은 한때 ‘인문디자인’과 ‘살림철학’에 심취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반가운 글이었다. 저자는 한국말 ‘살림’과 한자어 ‘拙(졸)’에 담긴 미학적 의미에 주목하면서 살림과 서툼의 아름다움을 피력하고 있다. 양자를 합치면 ‘시골살림의 미학[拙生美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림’은 “생명을 키우는 일상의 아름다움”이고, ‘되살림’은 “품어서 다시 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겨울이 가면 봄이 되살아나는 자연의 생생(生生)의 운행과 같다. “촌스러운 시골이 아름다운 것은 되살림의 자연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는 저자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전주시 공무원이자 인문강좌 기획자인 오충렬 주무관의 {한 젊은 청년의 초상—내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는 이상미의 {나대다, 유랑하다, 행동하다—어느 여성의 시민활동 성장기}처럼 한 편의 자전적 에세이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도시에서 동학을 공부하면서 인문학을 하는 도시인문학이자 도시동학이라는 점도 다르지 않다. 다만 이상미의 글이 소설적이라면 오충렬의 글은 시적이다. 그것도 농촌을 노래하는 시이다. 그런 점에서는 김은정의 {되살림: 천지마음을 그리워하는 re;design}과 비슷한 느낌이다. 실제로 저자는 어렸을 때 꿈이 농부였고, 그래서 농대에 진학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글에는 소년의 향기가 묻어난다. 그 소년은 도시에 살지만 농촌을 사랑하고, 공무원을 하면서도 인문학을 함께하며, 시대의 변화에도 철학적 고민을 놓지 않는, ‘양행(兩行)’을 하는 시민인문학도이다.


이어서 <다시쓰다>에서는 동학 연구자들의 글 6편을 실었다. 대부분이 동학을 연구하면서 경험했던 ‘고민’들을 담고 있다. 필자 중 절반이 20-30대 소장학자들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먼저 {동학이어야만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위하여}의 저자 유신지는 한국 현대문학을 연구하는 소장학자로, [다시개벽] 2호에 {개벽문학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글로 독자들에게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이 글은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명예교수가 발행하는 [リ-ラ-(遊) vol.12 “宗教観対話と平和構築”](2022.03)에 「開闢文学の動向と課題」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실리기도 하였다.


이번에 쓴 글은 한국문학에 나타난 동학사상을 연구하는 소장학자로서의 깊은 고민을 담았다. 글을 읽는 내내 최근에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동북아로(路)>> vol.6에 실린 일본의 동학연구자 나카츠카 아키라 명예교수(1929~)의 인터뷰 제목이 생각났다. 그것은 “나는 왜 동학을 연구하는가?”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동학문학’을 연구하면서 겪어야 했던 ‘정당화의 경험’들을 소개하고 있다. “왜 서양철학과는 달리 동학을 연구하려면 이런 변명들을 해야 하지?”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지난 10년 동안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다. 거기에 대한 나의 답은 “우리의 정신이 식민지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자이자 사범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김태웅의 {동학농민혁명사는 이웃과 동네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연구와 교육에 두 발을 딛고 있는 분의 글이어서 그런지 생생하고 호소력 있다. 최근에 여주에서 있었던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에서 “지역사로서의 동학 연구와 동학 교육”을 주제로 발표하시는 것을 듣고, 내용이 너무 좋아서 무리하게 원고를 부탁드렸다. 아울러 이날 학술대회의 발표를 듣고 “동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지금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동학에 관한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과 동학을 보는 지역 간의 견해차 등을 지적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경청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종교학자이자 동학연구자인 김남희의 {동덕(同德)이 동덕(動德)하는 세상}은 동학의 ‘영부’와 ‘주문’을 수양론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수운은 신비 체험을 통해 상제로부터 영부와 주문을 받았지만, 그것을 탈주술화하여 ‘신경성(信敬誠)’의 도덕을 완성해 나가는 동학 고유의 수양론으로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수양을 하는 동학인(東學人)을 ‘동덕(同德)’이라고 부르는데, 동덕은 단지 사적 차원의 신앙 활동을 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 안에서 공적 역할을 다하는 ‘시민’을 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도교 도인들이 서로를 부르는 ‘동덕’ 개념을 “덕의 사회화를 실천하는 시민”으로 해석한 점이 돋보인다.


{동학의 다양한 목소리}의 저자 박병훈은 문학과 종교학적 관점에서 동학을 연구하는 소장학자이다. 2020년에 지도교수인 최종성과 공동으로 번역한[시천교조유적도지—그림으로 읽는 또 다른 동학사]를 간행하였다. 동학에는 천도교뿐만 아니라 시천교, 동학교, 수운교와 같이 다양한 갈래가 있으며, 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복수의 동학들”을 추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실은 나도 이런 선행연구의 자극을 받아 최근에서야 ‘시천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시천교 계열에서 동학의 역사를 정리하고 문헌을 보존하는 작업에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은 본문의 서두에 인용되고 있는 최종성의 [동학의 테오프락시—초기동학 및 후기동학의 사상과 의례]와 같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한국정치사상을 연구하는 중견학자 이나미의 {김치와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글이다. 먼저 동학을 통해 본 ‘한국인론’이다. 이런 시도는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게다가 중국, 일본과의 비교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동아시아 삼국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배타적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시너지적 민족주의’를 제안하고 있는 점이 미래지향적이다.


특히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의 “쌍방이 모두 미워하는 대상은 (남성 일반이나 여성 일반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지적이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어린 딸들과 같이 본 추억의 만화 <달려라 하니>(1988)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국제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한 하니의 적수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한국인이었다. 외국 선수는 오히려 부상 중에도 선전하는 하니를 격려해 주고 갔다.


마지막으로 현대유럽 정치철학자인 양진석의 {시천적 민주주의를 향하여}는 이번 호에서 인터뷰 다음으로 긴 글이다. 먼저 유럽철학 연구자가 동학에 대해서, 그것도 논문 2편 분량의 방대한 학적인 글을 투고해 주신 데 대해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은 제목에도 드러나듯이 “동학의 시천주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기획을 위한 예비작업”이다. 그리고 그 이론적 작업에는 사회학자 김상준의 ‘중층근대성론’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것은 나의 동학 이해에 기타지마 기신의 ‘토착적 근대론’이 깔려 있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토착적 근대론은 ‘한국식 근대화론’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주장하는 ‘한국적 근대성’에 가깝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식 근대화’라는 말을 쓴 적도 없고, 무엇보다도 ‘한국식’이라는 표현 자체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최근에 쓴 <동학의 자생적 근대성: 해월 최시형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중심으로>(2020)에도 표현되어 있다. 나는 ‘자생적’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 점은 허남진과 박맹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토착적 근대론은 동학이 한국만의 독특한 근대성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인도나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세계사적 사건의 하나라는 것이 핵심이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하늘이나 사티아 그라하, 우분투와 같은 토착 개념 내지는 토착 사상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상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또한 나를 포함하여 박맹수와 허남진은 저자가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을 옹호하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저자가 지향하는 생태적 전환 기획에 가깝다. 이 점은 박맹수의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2014)이나 허남진의 <통합생태학의 지구적 전개>(2021) 또는 나의 <생태문명에 관한 동서양의 대화—토마스 베리와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동학의 재해석과 신문명의 모색] 2021)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안효성의 <동학의 토착적 근대성과 생명평화사상>(2019)에서 지지해 준 적이 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저자가 비판한 박맹수, 조성환, 허남진의 입장은 저자가 지향하는 방향성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하다>의 


{차옥숭, 모든 종교는 ‘나 없음’에서 만난다}는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편집장(홍박승진)이 가장 공을 들인 코너이다. 이번 호에서 가장 긴 글이고, 가장 많은 시간이 투자된 글이다. 이 인터뷰에서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현장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니—. 인터뷰를 정리한 홍박승진 편집장은 후기에서 “역사가 통째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나도 인터뷰를 하는 내내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인터뷰의 주인공 차옥숭 교수는 이미 2000년대에 서양의 생태신학을 섭렵하였고, 그것을 다시 해월동학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야 이 분야를 연구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선구적이고 귀중한 연구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인터뷰를 통해서 새삼 알게 되었다. 이것이 “다시 말하고 다시 듣다”의 힘이 아닐까?


<다시읽다>에 실린 


권수현의 {‘한남 콘텐츠’는 어떻게 혐오를 부추기는가? —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서사’가 초대하는 폭력의 향연}에서는 시점을 현대로 돌려서, 최근 들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이성(異性) 간의 ‘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다. 2022년 1월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끔찍한 재난 현장이 되어버린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학원 좀비물이다. 저자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 익숙한 폭력과 혐오 코드를 활용하면서, 잔인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성차별적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은 무성의한 콘텐츠는 폭력과 혐오의 바이러스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거대한 숙주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다시잇다>에서는 [개벽]과 [천도교회월보]에 실린 두 편의 글을 소개하였다.


먼저 원암재 오지영의 {시자문답(侍字問答)}은 1910년 9월~1911년 1월에 [천도교회월보]에 실린 글을 세 편의 글을 동학/천도교 연구자 박길수가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나는 ‘오지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린다. 오지영은 나의 고향이자 직장이 있는 익산에서 일제강점기에 천도교 운동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처음부터 국학문 혼용을 쓰지 않고 한글을 고집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익산에서 활동한 소태산 박중빈이나 가람 이병기와 상통한다. 이들도 하나같이 한글경전, 한글시조 운동을 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오지영은 [동학사]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을 뿐 [오지영전집(3권)]에 담긴 그의 사상은 전혀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시자문답}은 아직 ‘한울’이라는 개념(용어)이 정착하기 이전에 쓰여진 일종의 ‘하날(아래아)철학’이다. [편역자 주]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시기는 하날(아래아하+아래아날)이나 하날(하+아래아날) 또는 하날(아래아하_날) 등이 혼용되던 시기이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시자문답}의 마지막 편이 나온 지 5개월 뒤에, [천도교월보] 1911년 6월호에 처음으로 이종일과 오지영이 ‘한을(님)’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호에 처음으로 ‘한울’ 개념이 등장한다. 따라서 {시자문답}은 ‘한울’ 개념이 나오기 전에 ‘하날(아래아)' 개념으로 철학을 한, 그것도 하늘의 의미를 문답형식으로 재구성한 선구적인 문헌인 셈이다. 오지영의 이 작업이 이후에 이돈화의 ‘한울철학’으로 이어졌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돈화의 [신인철학] 서두에 나오는 한울철학은 오지영의 {시자문답}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김명옥의 {활동으로부터 초월로—전 인간의 연화(軟化)를 구제하고 치유하는 한 방안으로}는 [개벽] 20호(1922년)에 실린 소춘 김기전의 글을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김기전(1894~1948)은 니체 연구자 김정현에 의하면, 니체 철학을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1920년에 [개벽] 창간호에 실린 {힘[力]만능주의의 급선봉 푸리드리히 니체 선생을 소개함}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쓴 글이 {활동으로부터 초월로}이다. 


저자의 [해설]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제목에 나오는 ‘초월’에서부터 니체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 ‘초월’을 과거의 인습[因循]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 개벽파답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성벽 속에 유폐된 당신의 자아를 해방하여 우주의 대(大) 자아에 접속하게 하라”는 메시지는, 서구 근대의 자폐적 ‘자아’ 개념을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초인(超人)과 장자의 대아(大我)와이돈화의 ‘한울’을 연상시킨다.


이상으로 이번 호에 실린 13편의 글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하나 같이 귀중하고 의미 있는 글들이라 <권두언>을 쓰는데 일주일 가까이 걸렸다. 때문에 이번 호의 발행도 많이 지체되었다. 독자 여러분의 넓은 양해를 바란다.


** 정기구독자님들께도 다음주에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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