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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04. 2022

거리, 사이, 지는

마음공부3


사람(생물)은 각자가 편안하게 느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은 '근접공간학(Proxemics)'의 관점에서 인간 간의 거리를 다음 네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사람의 거리감각을 친밀한 거리(0.5m이내),  개인적 거리(1.2m), 사회적 거리(3.6m), 공적인 거리(3.6m 이상)으로 사람을 둘러싼 거리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조금 다르게, 서로 마주보고 대화하거나 소통할 때 친밀한 거리 쪽으로 다가서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최소한 개인적 거리만큼을 두고 마주서서 대화할 때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문화권에 따른 차이나, 나아가 개인간의 차이가 더 도드라지는 듯합니다. 


배려한다는 건, 상대방이 안정감을 느끼는 거리를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나의 불편(안)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자(다가서는 유형)의 경우 거리가 멀어질수록 상대방이 나를 경계하거나 거부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며, 후자(떨어지는 유형)의 경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상대방이 나를 위협하거나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무뢰한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동물들에게도 자기 '영역'이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감각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말투에도 각자가 편안하게 느끼는 말투가 달리 있습니다. 감각적이며 정서적인 표현을 선호하고 편안해 하는 사람도 있고, 사무적이며 이성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으며, 에둘러 표현함으로 '배려'하는 사람도 있고, 직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것으로 '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개는 이런 차이가 소통에 큰 문제가 없지만, 다툼이 일어나거나 서로 의견이 갈려서 논쟁할 때는 '말투'라는 형식이 쟁점의 본질(내용)에 앞서서 다툼을 키우고, 논쟁을 산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나이나 계급 등 사전에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대화가 일방적인 것으로 규정되던 시대나 사회(집단)에서는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1인 1표가 당연시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사람사람이 피장파장, 어슷비슷, 피차일반인고로 나이나 계급, 빈부 따위가 '싸움'에서 결정적인 조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나이 어리다고 나이 많은 사람의 '부당함'을 용인해 주지 않으며, 계급으로 밀어부치면 인권위원회에 고발해서라도 그 시비를 가리며, 빈부 차이로도 언로를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에서 '너 나이 몇 살이야'를 들이대는 사례는 예전보다 현격히 줄었다고 생각되고(가끔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으로 보면 많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예전에는 그것이 기삿거리가 안 되는 사례였고, 오늘날은 그 반대가 된 데 따른 착시현상이라고 봅니다.), 나이든 계급이든 따지지 않고 부당한 사례는 낱낱이 까발려지는 사례는 예전보다 훨씬 늘어난 것은, 현대사회가 이룩한 '자기 살해적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살해적 성취'란 지어낸 말입니다. 현대사회의 '개인주의'란, 한 사람의 가치를 최고의 자리에 옳려 놓은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의 많은 부분을 살실하게 하였습니다. 자업자득이요 제 무덤 제가 판 격입니다. 


싸움이 벌어진 다음에 '누가 먼저 잘못했나?'나 '누가 더 잘못했나?'를 따지는 건 하수 중의 하수의 대응이겠지요. 닭이 달걀을 낳은 것이고, 달걀에서만 닭이 나오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일단 다툼이 일어나면 끝까지 밀고나가는 것도 중요한 방법이나 태도가 되기는 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노래처럼 말입니다. 결국 법정에서 가려야 하는 일이 되어도, 피치못할 경우가 많은 것이 현대사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내(나)가 보기에 명백하게 부당해 보이는 상대방의 억지에 대하여 '져 주는 것'도 한 방법이 됩니다. 사회적 문제나 내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나 개인의 문제라면 그렇게 져 주기가 훨씬 쉬운 것이고, 공동체(집단)의 문제라면 내편을 설득해서 지는 싸움으로 인도해 나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봅니다. 36계-도망이 최상책이라는 말이,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 때만의 일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는 방책으로도 최상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비겁한 것이죠. 그래요, 비겁이 최선입니다. 저는 더러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밀고나가기-물러나기 중 후자를 주로 택하는 편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도 필요 없는, 말 그대로 '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구설수와 싸움수가 몸에서 떠나지 않는 요즘입니다. '사소한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저의 '전 존재(신앙의 근거)가 걸린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주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저의 전 존재란 얼마나 하찮은가를 생각하면, 둘(사소한 일 - 전 존재의 일) 사이의 차이는 없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지나갈 일입니다. 


* 첨부할 사진을 찾다가, 저 사슴(?)의 싸움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면, 사람의 싸움도 사람이 느끼기에는 지저분하고 역겨운 것일지라도 사실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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