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ul 22. 2023

어린이의 참된 동무 방정환 선생 유족을 찾아

개벽라키비움-방정환도서관(아카이브)


[편집자 주] 2023년 7월 23일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서거하신 지 9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해방 후에 간행된 <어린이> 잡지 편집자가 1949년경 인천에 거주하고 계시던 방정환 선생의 유가족(부인 손용화, 아드님 방운용 씨 등)을 찾아뵙고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인간 방정환"의 모습을 편린이나마, 잘 보여줍니다. 모든 어린이의 친구로 살아가신 방정환 선생의 등 뒤에서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방정환'을 그리워하며, 가난히 살아야 했던, 그분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도, 방정환 선생을 기억하는 중요한 일 중의 일부라고 여깁니다.]



어린이의 참된 동무

방정환 선생 유족을 찾아


1.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란 말을 처음 만드시고 또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제정하신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난신 지도 벌써 18년입니다. 남아 계신 가족이나 한 번 찾아 뵈옵고, 난날의 방선생님 말씀이라도 들어 보고자 기자는 인천행 열차를 탔습니다. 이른 봄 양지 쪽에는 파릇파릇한 잎이 돋기 시작하지만 바람은 아직도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인천 정거장에서 내려 선생의 가족이 계시다는 만국공원 앞을 헤매기 한 시간 만에 겨우 선생의 집을 찾았습니다. 선생의 맏아드님 되시는 방운용(方雲容) 씨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자가 온 뜻을 말하였더니 방운용 씨는 아버지 되시는 소파 선생님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소파 선생의 할아버지는 옛날 임금님 잡수시는 한약을 지어서 드리는 어른이었다 합니다. 지금은 당주동이지만 옛날은 야주개라고 부르는 곳에 계시어,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그만 사업에 크게 실패가 되어 소파 선생님 아버지 때에는 가난하게 지내게 되어, (소파 선생의 아버지는ㅡ편집자주) 인쇄소 직공으로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파 선생은 가난한 인쇄 직공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 하시어서, 그 동네 그림 잘 그리시는 분이 살고 계셨는데 하도 귀엽고 그림을 잘 그리니까 자기에게 양자로 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옛날이야기를 잘하여서 동네(동리)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밤이면 옛날이야기를 늘 하시었다고 합니다. 어찌나 이야기를 잘 하였든지 하나둘 모이던 아이들이 열, 스물씩 모이고 밤마다 찾아오는 어린이들이 하도 많아서 방에서는 도저히 다 들일 수가 없어서 일가집 마당을 빌려서 옛날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나마 오는 아이들이 많아서 나중에는 입장권을 팔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동화 대회의 처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입장권이라야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냥개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몰려드는 청중은 어린이들뿐 아니라 부인들, 노인들까지도 성냥개비를 들고 줄을 서서 들이 밀렸다고 하니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일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리 되었는고 하니 만원이 되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 중에 심술궂은 아이들이 돌을 던져 장독이 깨어지고 문창이 어지고 머리가 터지는 일이 생기게 되니 집을 빌려 준 일가 집에서도 반대를 하여 그만 못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그만치 소파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동화에 대하여 천재였던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선생께서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치를 수 없어 할 수 없이 중도에 퇴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우연한 인연으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기미년 독립운동을 일으키어 33인의 한분이시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영도자 되시는 천도교 교조 손병희 선생을 알게 되어 손 선생님께서 귀엽게 보시고 장래가 있는 청년이라 하여 사위를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선생께서는 다시 공부하실 뜻을 두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서 심히 공부하시면서 그때부터 특히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하여 힘쓰시기로 결심하고 동경 가서 있는 젊은 동지들을 모아서 우리나라 어린이를 위하여 일하자는 목적으로 만든 단체가 '색동회'입니다.


그 후 고국에 돌아오시어 그때 일본 정치의 혹독한 탄압 아래서 유치장 살림을 매일같이 하시면서도 글을 쓰고 말을 하고 갖은 애를 쓰셨습니다. 여러분이 매달 재미있게 보시는 이 <어린이> 잡지도 소파 선생께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이렇듯 많은 일을 하시다가 아깝게도 33세를 한 세상으로 1931년 7월 22일(sic. 23)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도 살아 계시다면 52세밖에 안 되시었을 터이니, 여러분도 소파 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도 있고, 재미있는 글도 볼 수 있을 터인데 참으로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감옥에를 끌려다시면서도 우리 어린이를 위하여 애쓰시던 선생이 우리나라가 해방 되고 독립 된 오늘에 살아 계시다면 그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결혼 직후 방정환과 동지들, 앞줄 가운데 방정환, 오른편 정순철, 왼편 방정환 첫째 동서 이관영의 아들 이태운(1899) 위 오른쪽 김상근. 이들 모두 '손병희 패밀리'들

2.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하는 기자의 질문에 운용 씨는

"어머니께서 갖은 고생을 하시며 저희가 이만치 자랐지요."

하시면서 지난 날의 고생스럽던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지금 소파 선생의 유가족으로는 이미 고인이 되신 손병희 선생의 따님이신 소파 선생의 부인께서 소파 선생 돌아가신 뒤 두 아들과 한 딸을 데리시고 집 한 칸이 없는 구차한 살림을 하시면서 지내오신 금년 49세 되시는 손용화(孫容嬅) 와 열네 살 중학 1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힘들게 학교를 마친 후 화신상회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대한석유 제장회사에 다니시는 32세의 방운용 씨와 선생의 하나인 외딸로 귀염받던 방영화 씨는 벌써 전에 시집 가고, 선생의 둘째 아드님 되시는 방하용 씨는 금년 25세로 인천서 어머니를 모시고 화장품 제조를 하고 계십니다. 복 받은 이 가정에는 지난해 운용 씨 아드님이 나서 소파 선생 부인께서는 귀여운 손자를 안고 벙글벙글하십니다.


"아버지 인상에 대해서 말씀 좀 하여 주시지요." 하는 기자의 질문에

"아버지는 눈 오는 날을 제일 좋아하셨지요. 눈 오는 날이면 눈을 맞아가며 산보를 즐기셨고, 못 잡숫는 술도 한 잔 드시면서 무엇인가 생각하였습니다. 인제 생각하니 동요나 동화 재료를 생각하신 모양이죠.


또 아버지는 얼음을 어찌나 좋아하셨는지 여름에 빙수는 얼마든지 잡수셨지마는 추운 겨울에도 집에 돌아오시면 남은 추워 죽겠는데 얼음을 갈아오라는 데는 참으로 귀찮았습니다. 술은 잡숫지 않아도 담배는 무척 피우셨지요. 참대로 만든 파이프에 공초를 피워 물고 글 쓰시다 그냥 빨아서 참대 파이프가 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습니다.


제일 인상에 깊은 것은 우리들이 장난을 치다가 아버지에게 들키우면 남의 아버지같이 때리거나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을 시킨다고 그냥 자리에 앉아(혀) 둡니다. 그때 생각에는 다른 아버지같이 한두 개 때리고 밖으로 내어 보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반성 시킨다고 방에 앉았던 생각은 지금 생각하여도 귀찮고 또 이로웠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정의 아버지는 아니었지요. 집에서 별로 만나뵐 일이 없으셨으니까요.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도 우리들은 전부 어머니 손에서 길러난 셈입니다. 가정 살림에는 전혀 돌보지를 않았으니까요."


다시 기자는 소파 선생 부인에게 말머리를 돌려 가정에 계시던 소파 선생을 물어 보았더니 부인께서는


"그 어른인 한 가정의 남편이나 아버지로 모셔 보지 못하였습니다. 별로 집에 계시는 때도 없었지요. 혹 눈이나 내리는 날이면 친구들과 같이 몰려 오지요. 친구들이 오게 되면 술 든 사람 술 들고, 안 주 든 이 안주 들고 집에 돌아와서 저는 손도 못 대게 하고 어른들끼리 손수 요리를 만들어 한 잔 잡숫는 일이 간혹 있었지요.


또 성미가 대단히 누그러서, 어떤 때는 추운 겨울날 형사들이 달려와서 선생을 잡아 갈 때가 있었지요. 그럴 때에는 더욱 느려서, 하기야 번번히 당하는 일이니까 귀찮기도 한 탓도 있겠지요마는, 남을 바람 부는 밖에 세워놓고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보던 일을 다 보시고 도 천천히 옷을 갈아 입고 끌려 가시곤 하였지요. 하여튼 해방 되고 독립 된 오늘에 아들 손자를 눈앞에 놓고 본다면 '살아 계셨던들(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하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좀 더 앉아서 선생의 말씀을 듣고도 싶었으나 그만 인사를  드리고 밖을 나섰습니다.

만국공원 (일제강점기) 가운데 높이 보이는 건물이 인천각

만국공원에 우뚝 솟은 인천각(인천각)이 보입니다. 이 인천각은 선생께서 병들었을 때 정양 와서 유하시던 곳입니다. 선생은 생존 시에 인천의 바다를 좋아하셨고, 인천에서도 특히 만국공원의 경치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인연이나 있었는 듯 해방 후 선생의 유가족은 이 만국공원 앞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입니다. 인천각도 그 사이 주인을 몇 번이나 바꾸어 해방 후에는 미국 사람이 들어 있다가 우리나라 독립과 함께 완전히 우리 손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선생의 넋이나마 간혹 이곳을 감개 깊게 소풍이라도 오시는지? 눈을 들어 봄빛에 물들어가는 만국공원을 바라보니 맑게 개인 봄 하늘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인천각 지붕 그 아지랑이 속에 선생의 뚱뚱한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뫼 씀


개벽이 폐간되는 1926년 8월 1일, 개벽사 안에서 "혁명투쟁 개벽 7년 8월 1일 오후 4시-환원"이라고 쓴 깃발 앞에서 개벽사 사원 일동이 기념(?) 촬영을 하였다.    

----------------------------------------------------------------------------------------------------------------------

* 방정환도서관 : 개벽라키비움 내의 한 기관. 방정환에 관한 자료를 수집 연구하고, 이를 널리 공유하며, 방정환과 그 동지들의 활동, 어린이운동, 개벽사에 관하여 연구하며, 이를 널리 공유하고, 발표, 강연, 답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