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 <조선일보>, 1923년 1월 4일 - 기획 ‘새해에 어린이 지도는 어찌할까?’
[편집자 주 - 이 글은 1923년 1월, 신년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의 어린이운동 방향을 각 단체 지도자들에게 듣는 가운데, 천도교소년회의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 소년회 결성 경위, 그리고 운동의 원칙과 방향 등을 소개한 기사이다. 천도교에서는 1919년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결성하고, 1920년 이를 천도교청년회를 개칭(개편)하였고, 그 이듬해 1921년 5월 1일 청년회 산하의 소년부를 "천도교소년회"라는 준 독립기구(단체)로 발족하였다. 이 '천도교소년회'는 소년운동을 표방한 단체로는 조선 최초의 조직이다.(독립운동단체, 교회 내의 주일학교, 근대서당 등을 제외한) 천도교소년회 결성 1주년인 1922년 5월 1일, 1주년을 기념하며 이날을 "어린이이 날"로 선포하고 거리선전 등의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어린이날의 시초가 된다. 그로부터 다시 1년 후인 1923년 5월 1일에는 방정환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제1회 어린이날 행사를 진행하였다. 이때도 거리 행진과 선전지 배포 등을 진행하였다. 2022년 들어 어린이운동 단체들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 제정일로,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 해방(인권)선언 100주년으로 구분하여 정체성을 분명히 해 나가기로 하고 다양한 사업과 행사를 준비중이다.]
세계에 어떠한 나라이든지 그 나라의 발달을 보려면 먼저 그 나라의 아이가 노는 것이라든지 일상의 생활하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지금까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만 생각하여 오직 압박만 하여 조금만 잘못하면 때리고 나무라고 할 뿐이며, 그리고 그 아이가 잘한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잘하였다는 표시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어른의 말에 눌리어 자기의 마음에는 잘하였건마는 자기의 어른의 마음과는 맞지를 아니함으로, 오직 잘못하였다는 나무라는 말만 듣고 울 뿐이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대하여 알지 못하는 책망을 하건마는 그는 어른인 고로 마음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태로 한 해 두 해 지내이다가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서서 무슨 일을 하는데도 관습에 어른이란 것에 눌리어 자기의 이상과 자기의 하고자 하는 바와는 대단히 틀리건만 어찌할 수 없이 순종하다가, 결국[畢竟]에는 신구(新舊)의 출동이 맹렬하게 일어나는 일은 근일(-최근)의 각 사회를 보더라도 가히 짐작할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린아이를 잘 인도하고 해방하어서 조금 자유스럽게 천진 그대로 지키게 하는 것이 자녀 교육의 가장 필요할 바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소년회를 지도하는 천도교소년회의 방정환 씨는 말하되,
“우리의 회가 성립되기는 벌써 재작년(1921년-편집자주) 5월 1일이외다. 우리의 회가 조직되자 조선 전도에 이르는 큰 곳은 거의 다 조직되었으며, 겸하여 각 사회에서도 소년 문제에 대하여 현재에 주의를 깊이 하니 이에 대하여 노력하는 중이외다. 그러므로 작년(1922년-편집자주) 5월 1일에는 ‘어린이의 날’이라고 하여 전 조선에 선전하였습니다.
이제부터도 될 수 있는 대로 기회가 허락하는 대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려고 하는 중이외다. 이것은 우리 천도교소년회뿐 아니라 다른 소년회와 연합하여서 하는 것이 좋을 줄 믿습니다. 겸하여 우리 회는 종교적으로 천도교인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든지 입회를 시키나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회원이 58명이외다. 이 소년들만 완전히 지도한다고 하여도 이후의 소년들은 비록 만 분의 일이나마 행복스러울 듯하외다.
참으로 조선의 아동교육은 너무나 한산하였습니다. 외국의 상태를 보고 전하는 말을 들을 것 같으면, 어린이를 극히 사랑하고 만반사(萬般事-모든일: 편집자주)를 어린이에게서 비롯하고, 그들을 위하고 지도할 신문까지도 발행하였으며, 학교의 교육도 극히 잘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너무나 어린이에 대한 기관이 부족하외다. 부족할 뿐 아니라 무정한 터 이외다. 작년에 내가 [사랑의 선물]이라는 책도 그들을 줄 셈하고 그들(=천도교소년회-편집자주)의 환락(=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발행한 바이외다.
이제부터는 각지의 소년 단체가 많이 일어날 줄을 믿으며, 우리 동포가 하루(하로)라도 먼저 사람스럽게 또는 자유스럽게 행복스럽게 생활을 하려면 먼저 어린이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고 그들을 위하여 사업을 경영하여야 하며, 기관을 설비하여야 할 것이외다.
참으로 어린이들처럼 중한 이는 없을 것이외다. 그들은 바다에 띄워 있는 배와 같이 바람이 동으로 불면 동으로, 서로 불면 서로 흘러가는 것과 같이 지도하는 이의 지도하에 따라서 혹은 행복의 길로 혹은 불행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외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그들을 어찌 하로(하루)나마 범연하게 여기랴.’ 하고 매우 근심하는 빛으로 말하더라.
- 천도교소년회 방정환 씨 담(談 =이야기)
사진설명 : (이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태운은 손병희 선생의 외손자, 즉 첫째딸 손관화(-이관영)의 아들로서, 방정환과 갑장(1899년생 - 이종사촌)이다. 동경 유학시절에도 든든한 동지가 되었으며, 해방 이후 방정환에 대한 많은 증언 기록을 남겼다. 정순철(1901년생)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외손자(어머니-최윤)이다. 해월의 부인이 손병희의 여동생이므로 방정환과도 인척관계라고 할 수 있다. 방정환이 손병희 선생의 사위가 되어 가회동 손병희 선생 댁에 살 때, 정순철은 청산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바로 윗집에 있던 해월 선생의 부인(손병희 선생의 여동생) 집에 기거하며, 방정환과 어울려 지냈다. 그 또한 동경유학 시절 방정환의 동지로서, '색동회' 창립 멤버이고, 귀국 후에는 동요 작가로서 많은 동요를 창작하였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48년 새로운 대한민국 정부 체제하에, 졸업생을 위한 '졸업식의 노래(빛 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를 지었다. 뒷줄 왼쪽은 손희준(1913년생)이다. 그의 부친 손재용은 손병희 선생의 조카이고, 손희준은 재종손이 된다. 야구선서 생활을 했고, 해방 이후 손병희 선생의 부인 주옥경의 양자로 입적시켰다.(손자뻘을 아들로 입적시키는 것은 오류). 뒷줄 오른쪽은 김상근(1896년생)이다. 손병희의 아우 손병흠의 사위(손병흠의 딸 손문화의 남편)이다.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 전신), 와세다 대를 졸업하였다. 3.1운동 때 피검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1910년에 한성교구에 입교하였다. 해방 이후 의암손병희선생 기념사업이 전개될 때(1959-61) 중심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