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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06. 2023

태초에 감응이 있었습니다

개벽라키비움-동학천도교철학사전연구회


어제(07.05)는 <개벽라키비움 '동학천도교철학사전연구(집필)'> 모임이 있었습니다. 

원불교대사전의 '심고와 기도' 항목을 공부하였고, 


"감응"이라고 하는, 동학(천도교)의 수도(修道)와 의례에서 중요한 개념에  대한 발제문(정의, 용어 유래와 변천, 설명, 쟁점) 공독(共讀)하고 토론하였습니다.(발제-'감응' 항목 설명문-는 제가-A4-9매 분량)  

어제 아주 일부만 말했던, '감응'의 (철학)사전적 정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번에 '감응'에 대하여 사전적 정의를 정리하면서, "태초에 감응이 있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여러분!!
태초에 감응이 있었습니다. 

과학에서의 '빅뱅이론'의 창발론이나 종교에서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창조론의 맥락 그대로입니다. 태초에 감응이 있었고, 그 감응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현대인(비종교인, 무신론자)이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창발론(과학)과 창조론(종교)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물론 우주적 스케일에서 보면, 초기의 '극미세'한 차이가 현재의 우주의 존재방식을 결정(극미세의 차이만 있었더라도 현재의 우주는 존재하지조차 못하는)한다는 점에서 '크지 않은 차이'도 중요합니다만. '소이(小異)보다는 '대동(大同)'이 둘 사이의 관계의 본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론의 본지(本旨)는 본래부터가 감응론이었고,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의 빅뱅이론(빅뱅 이후가 아닌, 빅뱅까지의 경로에 대한 최신 이론) 같은 것도, 확실히 '감응론'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감응의 극치를 표현하는 말이 바로 '오심즉여심'입니다. 이때는 한울님도 수운에게 감응하고, 수운도 한울님에게 감응합니다. 나아가 나무와 풀, 꽃과 바람도 감응하는 존재입니다. 실은 존재하는 감응입니다. 존재가 감응입니다. 감응하므로 존재합니다. 


감응은 무선무악-불택선악입니다. 흰 것을 구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에게도 감응은 있습니다,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종교입니다. 


도(道) 혹은 진리 자체와 '종교'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됩니다.(진리를 종교-신앙할 수는 있으나, 종교 자체가 절대적으로 진리가 되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인간세상의 일로서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종교 또는 종교인이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에는 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는 모두 종교를 외면하고, 공론장에서는 종교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문명인의 에티켓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초에 감응이 있었고, 그 감응이 오늘의 우주 전체를 싸고 돈다는 것입니다. 동학(천도교)에서 심고는 그 감응에 감응하기 위한 절차도정입니다. 심고, 그래서 참 좋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기쁜 일입니다. (동학천도교철학사전 공부는 격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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