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동학, 주유팔로_0.3]
1.
다시 출발하는 방법 중에 '처음으로 돌아가기'가 좋겠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들은 트랙에서 몸을 풀다가 경기가 시작되려고 하면 출발선에 정렬한다. 그리고는 스타트블록(출발대)에 두 발바닥을 밀착시킨다. 가장 밑바닥, 100미터 결승선으로부터 가장 먼 곳-출발선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2.
다시, 동학, 주유팔로의 출발도 그렇게 해 보면 좋겠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렇게 해 보려고 한다.
멀리뛰기 선수, 높이 뛰기 선수는 아예 도약대로부터 훨씬 뒤로 물러서서 달려나갈 준비를 하기도 하니, 100미터 달리기 선수들의 출발대가 그 어떤 것보다 '처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시, 동학, 주유팔로"에서 내가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지점이, 동학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처음, 처음의 처음은 아닐 수 있다. 수운 선생이 탄생하던 1824년 10월 28일을 떠올릴 수도 있고,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조선 사회의 내적인 부패가 야기되는 시점, 혹은 수운 선생이 세상 사정을 살피기 위해 주유천하를 시작하던 바로 그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도 있을 테다. 나 또한 필요한 경우 그 지점을 찾아서 재음미해 볼 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서세동점의 경로를 따라 서구 근대화(산업혁명)의 출발점, 혹은 그 이전 시기와 공간으로 거슬러가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심리적으로 수운 선생이 가르침을 펴던 초기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출발대'를 삼으려고 한다. 수운 선생이 태어나, 동학을 창도하기 위해 필요했던 주유팔로를 거치고,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한울님을 만나면서 동학창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종교체험(신비체험)을 하던 시점보다 좀더 이후가 되는, 그러한 종교체험을 심화확장하며 갈고 닦기를 거듭하던 경신년 내내와 신유년 상반기를 지나, 신유년(1861) 여름을 지나, 동학을 공식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직후의 어느 시점이 이 글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3.
다시, 동학, 주유팔로의 또 하나의 조건은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기존의 관행, 관례, 관계를 벗어 버리고, 기존의 인식, 인정, 인과를 지워 버리고자 한다. 이것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쉬이 되는 일은 아니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해서 금방 되는 일은 아니다. 내려놓음이 선승들의 핵심 수행법이고, 그걸 평생해도 다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기존에 구애되지 않는 일이 어찌 내 뜻대로 되겠는가.
이것(내려놓음)은 출발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다시, 동학, 주유팔로 내내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되풀이해나가야 할 숙제일 터이다. 그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불해야 할 수고로움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3-1.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법칙"도 여기에 갖다 붙여 볼 수 있다. 수운의 가르침(부처님이나 예수님의 가르침, 공자님이나 노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겠지만)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단순명쾌한 것이라 믿는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굴려 보는 인간 인지작용의 흔적이, 마치 눈위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처럼 동학-천도교 이해의 창을 복잡다단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면도날로 잘라내고, 가장 단순한 것을 찾아내 보자는 것이다. 그 과정이 곧 주유팔로의 과정이기도 하다.
3-2. 일찍이 의암 손병희 선생은 사람과 만물이 개벽하는 이치에 대해 설명하면서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복잡한 것을 간단하고 깨끗하게 함을 말함"이라고 하였으니, 가볍게 함 = 단순하게 함은 곧 '개벽'하고자 함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과 이음동의어이기도 하다.
4.
수운 선생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성스러움의 일상화와 일상의 성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성스러움의 일상화란, 말하자면 한울님이라는 성스러운 존재, 혹은 그 성스러움을 세속의 인간에게 내재화 혹은 일체화함, 즉 시천주라는 가르침을 펼친 것을 들 수 있다. 일상의 성화란, 그렇게 해서 한울님을 세속으로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 일상(세속)을 천상으로 승화시키고 성화시킴으로써 사람은 지상신선이 되게 하고, 이 세상은 지상천국이 되게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5.
그 성스러움의 일상화, 일상의 성화를 실현하는 방법은 '수도'이고 수도의 방법은 '수련'이고 '수련'을 '일상적으로' 하는 방법이 바로 심고(고천, 식고)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동학, 주유팔로는 심고(고천, 식고)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