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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02. 2023

~에 대해서가 아니라, ~로서 말하기, 쓰기

[다시, 동학, 주유팔로_0.4]


하나의 반짝이는 생각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일관되게 인생을 설명하고, 나아가 세계를 설명하는 체계로 수립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는 결정적인 종교체험, 즉 한울님과 문답을 통해 "무궁무궁한 도"를 받는/얻는/깨닫는 체험을 하고도 1년여의 시간 동안 "수이련지"하였던 것도, 일회적 혹은 일시적인 깨달음을 "온 체계"(cf. '온생명')로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좋은 글쓰기에 사색의 시간이 꼭 필요한 것, 혹은 사색의, 침묵의 시간에 좋은 글이 예비되는 것도 그 사색-침묵의 시간 동안 '한 생각'이 '한(온) 체계'로 숙성되고 성숙되기 때문이다. 일관된 체계를 충분히 완성하지 못한 생각을 섣부르게 내놓는 글/말은 강렬하지만 짧게 끊어지고, 이어지지 못한다. 삶의 자양분이 되어, 나(사람)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이것은 다분히, 지금 이 글도 그러하지만, 오늘날의 글쓰기가 SNS라는, '빈도'를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에 쓰이기 때문이리라. 인간이 '사냥감'을 따라 다니느라 진화하였듯이, 오늘날에는 SNS를 따라가며 진화하는 중인 것이다.) 


어제(11.29) 천도교회월보강독에는 모처럼 한 사람이 더 참여하였다. 어제는 모두 4편을 강독하였는데, 그 내용들을 섭렵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분들은 '천도교에 대해서 말하는(글쓰는) 것'이 아니라 '천도(교)를 말하고(글로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의 천도교 혹은 동학 진영의 글쓰기/말하기는 '천도교/동학에 대하여' 말하고, 해석하는 습벽에 빠져 있다. 기존의 (교리)해석에 더하여, 혹은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데 골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 내부의 지식인들은 방구석 퉁수를 면치 못하고) 현 시점에서 그 정점에 서 있는, 그 방면의 장점을 가장 잘 발휘하는 이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아닌가 한다. 


그 가장 먼쪽 반대편에 '자족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천도교인들이 있다. 그네들도 한때는 갈급함(동학/천도교가 지금보다 훨씬 잘 될 수 있고, 잘 되어야 하는데)이나 비판적 시각(천도교(중앙총부/교구)가 이래서는 안 된다)이 없지 않았으나, 어느덧 세월이 가고 또 가서 이제는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태연자약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분들이다. 이분들은 매 시일(일요일)에 교당에 나오고, 간혹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데 만족(?)하고 있을 뿐이다. 이분들은 천도교에 '대해서'나 동학에 '대해서' 말하거나, 비판하지 아니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고 즐길(?) 뿐이다. 이분들의 (일상의) 삶이 천도(교)로부터 이탈한 것이라거나 미흡한 것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러기에는 그분들의 (일상의) 삶의 행태에 대해서 아는 바가 너무 적다. 시일날 잠깐 뵙는 그분들의 모습이 그분들의 진심이거나 진실이거나 진상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혹 그분들이 보여주는 교회/교리에 대한 초연한 모습이, '교회(천도교)에 나오는 것은 나오는 것이고, 하루하루의 삶은 삶'이라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 말을 하는 나는 천도교를 하는 사람은 / 동학을 하는 사람은 천도교에 '대하여', 동학에 '대하여' 말하거나 행동할 것이 아니라, 천도교(인으)로서, 그리고 동학(인)으로서 세상과 세상사람들에 대하여 발화(발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책(글)읽기, (사람과) 대화하기 혹은 듣기로부터 시작된다. <천도교회월보> 강독은 그중에서 글읽기의 일환이 된다. 


동학(천도교)의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말하는 단편적인 생각과 달리 천도교회월보의 글들은 자기 생각을 자기 문체로 표현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현재 1911년 치 강독 중). '대해서'가 아니라 '~로서' 한 말이나 쓴 글은 '해설서'나 '해석서'가 아니라 '원전'으로서의 가치가 있고, 원전으로서 기능한다. '원전'은 '경전'의 특성을 띤다. 그 글이 꼭 '한문'이어서가 아니라(천도교회월보는 1920년까지는 한문으로 된 글이 매우 많다. 점점 줄어들기는 하지만), 자기 생각을 자기 목소리로 하는/쓴 말/글이어서 그렇다. 


2023-24년의 주유팔로,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길도 그러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자기 글을 찾아 내놓는 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숙성과 성숙의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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