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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17. 2018

종교 안에서 종교를 넘어-2

새 책 이야기 

(이전 글) 종교안에서 종교를 넘어-1 : https://brunch.co.kr/@sichunju/145



2. 초월적인 시각, 혹은 통찰력을 얻기 위한 종교간 대화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것이다.” (막스 뮐러)


이 말은 종교간 대화 내지 종교 다원주의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금언이다. 불교계 설화에서 유래한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도가(장자)의 설화에서 유래한 ‘우물 안 개구리’, 생활 속의 지혜를 담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 같은 것이 지시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사람의 눈이 두 개가 달린 까닭에 사물과의 거리감이나 사물의 실상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굳건한 ‘믿음’에 크게 의존하는 종교 이해/신앙에 있어서, 타자(이웃종교)를 아는 것은 자기 종교/신앙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하나의 종교전통에 충실한 ‘전형적인 신앙인’은 물론이고, ‘칸막이’를 높여온 근대 학문의 흐름에서 종교(학) 이해 역시 이러한 외눈박이 나아가 장님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향이 오랫동안 심화되어 왔다.


종교의 세계에서 이러한 ‘타자 몰이해’ 또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문화’는 크게는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국가 간 전쟁과 종교 분쟁을 낳고, 작게는 가정 내에서, 혹은 개인 간의 크고 작은 종교 간 갈등을 낳게 된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도 '공존의 다종교 문화'를 지켜오는 모범적인 국가로 자처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불화’와 ‘투쟁’의 민낯은 쉽사리 드러난다. ‘정교 분리’를 표방하면서도 정교간의 밀착이 해방 이후 단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심화일로를 걸어온 것도 그러하고, ‘훼불사건’이나 ‘땅 밟기’ 같은 치졸한, 그러면서도 때로는 위협적인 “종교 분쟁”이 빈발하는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사건은 ‘종교와 종교 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내부에서도 끊임없는 ‘이단 논쟁’과 같은 ‘소수자 배제와 다양성의 차단’의 행태로 자행되곤 한다. 최근의 사례만 보아도 2016년 1월 17일의 개신교인에 의한 개운사(김천시 소재) 훼불 사건에 대해, 이를 원상회복하기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던 서울기독대 손원영 교수에 대한 학교의 징계, 2006년을 전후로 하여 이찬수 교수(당시 강남대)가 불상 앞에서 절을 했다는 이유로 역시 학교로부터 재임용을 거부당한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종교간/내 갈등과 무지를 근본적으로 해소해 나가기 위해서는 종교 간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두 종교 혹은 여타 종교를 포함한 종교와 종교 사이의 다름과 같음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문화를 뿌리 내리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여, 불교계 종교학자와 기독교계 종교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렀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면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는 한 참가자의 말이 이러한 대화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일찍이 인도의 신학자 파니카(Raimundo Panikkar)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출발했다. 나는 나 자신이 힌두인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임을 그만두지 않은 채 한 사람의 불자가 되어 돌아왔다. (이찬수, 다르지만 조화한다, 모시는사람들, 10쪽)


"불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를 통해 '하나의 종교의 틀'이라는 손가락 안에 갇힌 노예상태를 넘어서서 '종교라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진리와 해탈의 세계로 향하는 길은 멀리, 높은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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