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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2. 2018

한일영성개신정담(韓日靈性開新鼎談)(2)

대담 : 김태창·기타지마 기신·야마모토 쿄시 / 번역 : 야규 마코토 / 정리 : 조성환

[개벽신문] 제70호(2017년 12월호


2. 영성이란 무엇인가?


(1) 종교·정치와 영성


김태창 : 제가 젊은 시절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연구활동을 계속해 왔지만 만족하지 못해서 동유럽과 러시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된 러시아문학을 읽으면서 인상이 깊었던 것은 대지에 대한 강렬한 집착입니다. 거기에 유럽적인 것이 들어가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면서 어떻게 융합되어 갔는지가 당시 저의 관심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영문학에, 고등학교 시절에는 독일문학과 프랑스문학에, 그리고 대학 시절 에는 러시아문학에 매력을 느끼고서 손에 닿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기타지마 선생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문득 러시아적 영성을 강조한 블라디미르 솔로비에프(Vladimir S. Solovyov, 1853-1900)와 [고요한 돈강]에서 러시아혁명기의 파란만장한 사회상·인간상·사상전개상을 그려낸 미하일 숄로호프(Mikhail A. Sholokhov, 1905-1984)가 생각납니다. 대지에 뿌리내린 그들의 영성에서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나 교토학파(京都學派)의 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일본적 영성’과의 유사성이 감지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들도 있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실은 러시아정교의 이단파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기초를 닦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Anatoliy V. Lunacharsky, 1875-1933)는 “신을 세우지 않는 한 사회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김태창 : 그리스정교 혹은 러시아정교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혁명 후의 레닌과 스탈린은 실제로 신이 되고 절대독재를 정당화했습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신학에서는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의 히틀러는 신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일본과 다른 나라와의 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예를 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자기가 신이 되어 키리시탄(천주교도)들을 적대세력으로 박해했습니다. ‘종교’를 정치철학적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저 자신 젊은 시절에 독일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연구한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만 ‘신’과 ‘인간’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멋대로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한 자제=자기억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무화(自己無化)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고난을 겪음으로써 모든 인류의 구원을 실현시키기 위한 자기부정입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함을 좌절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케노시스(=자기무화)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없고 신의 뜻대로 살았다고 해도 신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기타지마 기신 : 정토교(淨土敎)의 사상에 방편법신(方便法身)과 법성법신(法性法身)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법성법신’은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색깔도 형태도 없고 초월적 세계에 존재합니다. 법성법신은 방편법신이 되어서 시공을 뚫고 우리를 구제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양자는 불이일체(不二一體)의 것으로 서로 침투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방편법신’은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권상 (卷上)에 보이는 아난다(阿難, Ānanda)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아미타불을 본다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절대자’를 예컨대 ‘내재이면서 초월’이라는 식으로 본다면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셨듯이 이 세상 사람이 신이 되어 버립니다.


야마모토 교시 : ‘내재이면서 초월’이라는 표현은 위험합니다. 인간이 갑자기 법성법신이 되어, 자기부정·회심(回心)의 싹을 잘라버리고 자기주박(유아독존)에 빠져 버립니다. 스스로를 ‘선인(善人) 의식’이라는 실로 꽁꽁 묶어버리고 남을 거기에 끌어들이는 심리적 폭력·기만의 비극을 낳게 됩니다. 나치의 히틀러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내재의식 속에 타자를 가두어 두는 것이니까 ‘초월’과 정반대입니다. ‘초월’이라는 말에 취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남을 경애하는 내성적인 인격자라면 속담에서 말하듯이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이삭과 같이” 되어야 됩니다.


기타지마 기신 : 탈종교를 내세우는 서양식 근대국민국가가 출현하자 초월적인 신이 내재화되고 국가가 신이 되어 사람들을 통제하게 됩니다. 근대국민국가의 약점은 권력자가 신이 되는 논리구조입니다. ‘권력자’의 ‘권(權)’은 ‘가(假)’, 즉 “임시로, 빌려줌”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 위에 있는 신에 의해서 단죄될 수 있는 시스템이 근대 이전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재적인 신이 곧 신이다”라고 말해버리면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2) 영성의 내용


김태창 : 불교의 정토진종의 가르침에 ‘영성’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는 ‘영성’ 문제가 중시됩니다. 제가 접한 아프리카인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보다는 영성 쪽에 친근감을 느끼고, 거기에서 인간을 다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타지마 선생께서는 영(靈)이나 혼(魂)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기타지마 기신 : 선생님께서 [미래공창신문]에 쓰신 것처럼, 영성이란 ‘입자적(粒子的)인 것’이 아니라 ‘파동적(波動的)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신자들에게 종교는 정신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을 나눌 수 없는(不二)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해 왔습니다만, 그 주장을 지탱해 온 것은 사실 실감이라기보다도 로고스(이론)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절에서 에이타이쿄(永代經)라는 법회가 끝나고 본당의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제 손녀가 오더니 “할아버지 뭐 하고 계세요?”라고 묻길래, “할아버지와 같이 툇마루1에 내려가자”라고 했더니 손녀가 “안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왜 안 내려가는데?”라고 물어보니까 “여기서부터 바깥은 신발 신고 가야 되니까 싫어”라고 하더군요. 제가 “아니, 여기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곳이 아니야. 할아버지가 거기를 잘 닦아 놓았으니까 괜찮아”라고 말했지만 툇마루를 잘 보면 깨끗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바깥이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는 그때부터 매일 그곳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느티나무 판으로 된 툇마루인데 평소에는 게을러서 안 닦았기 때문에 일주일을 닦아도 열흘을 닦아도 전혀 변한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목수를 시켜 대패질을 해서 예쁘게 꾸며볼까 생각하면서 무심코 툇마루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절 본당은 남쪽을 향해 있으니까 동쪽에서 툇마루를 보면 서쪽에서 햇빛이 들어와서 옆집 아파트가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 그렇구나!” 라며 대단히 감동했습니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치 거울과 같이 깨끗해졌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아미타부처님의 소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잘난 척하면서 본당 안에서 불교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회활동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둘이 나누어지고 있다. 너는 툇마루를 제대로 안 닦았잖아. 접점을 잘 안 닦았잖아. 접점을 잘 닦아야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아아, 맞다!”라고 깨달으면서, 기뻐서 “나무아미타불”이 입에서 절로 나왔습니다. 손녀는 무심코 말한 것이겠지만 손녀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절대자로부터의 ‘촉구’가 바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덧붙이면 툇마루를 제대로 안 닦았던 제가 “어차피 깨끗해지지도 않으니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한 ‘어리석은 나’를 그때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본당(불법)과 바깥(사회)의 접점을 닦는 것이 너에게는 결여되어 있었어. 그것을 느껴야 돼”라는 말씀에 “과연 그렇구나”라고 납득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배운 것도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바깥에 계신 분(부처님), 즉 외부성(外部性)으로서의 부처님께 들은 것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툇마루는 매체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내부의 본당과 바깥의 정원과는 달리 중시되지 않으니까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툇마루라는 통로가 있기에 참배자를 무량의 빛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과 바깥을 매개해야 할 요즘의 언론매체들은 신·부처님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반사해서 미래를 여는 선도자(先導者)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와 고작 몇 년, 몇십 년의 예측이라는 일상성의 의식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근·현대 패러다임을 돌파할 수 있는 미래공창으로의 의지는 과거-현재에 얽매인 이성·감성·의지만으로는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래공창’은 하늘·땅·사람이 상관연동하는 ‘미디어 혁명’을 필연적으로 수반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살고 있는 인간의 활동이고 ‘사람’은 하늘과 땅의 영성과 서로 어울려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감성·의지를 그 연원에서 발동시키는 작용이야말로 ‘미래공창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본이 패전 직후에『 영성적 일본의 건설』을 외친 스즈키 다이세츠의 바람과도 상통합니다.


김태창 : 왜 스즈키 다이세츠는 ‘일본의 신생(新生)은 영성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영성 3부작 -[일본적 영성(日本的靈性)]·[일본의 영성화(日本の靈性化)]·[영성적 일본의 건설(靈性的日本の建設)] - 을 통해서 새로운 일본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올바른 영성의 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기타지마 선생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기타지마 기신 : 스즈키 다이세츠는 이른바 일본정신이나 일본혼[大和魂]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정토진종의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일본인의 영성=신심(信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혼’이라는 말을 별로 안 쓰기 때문에 스즈키 다이세츠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인 부인을 통해 접한 기독교에서 개념을 빌려와서, 종래 일본에서 사용되어 온 ‘일본정신’이나 ‘일본혼’이라는 말로는 파악할 수 없었던 변화의 원동력을 나타내기 위해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을 도입한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듭니다. 불교학자이자 거사(居士)로서 누구보다도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스즈키 다이세츠가 굳이 불교용어가 아닌 영성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불교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탈바꿈을 도모한 것이 아닐까요?


기타지마 기신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태창 : 일반적으로 ‘영성’이라고 말하면 뭔가 신비스럽고 보통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워 특수한 체험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영성을 종교나 신학의 틀 안에 가두어놓는 종래의 영성론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인문학적으로 - 그러니까 철학이나 사상이나 예술이나 문학을 통해서 -  다시 새밝힘 해보고 싶습니다. 


영성에 해당되는 영어·독일어·프랑스어나 산스크리트어·라틴어·희랍어·히브리어 등은 모두 어원학적으로 살펴보면 하나같이 ‘공기’나 ‘호흡’이라는 말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원적 생명력=생명에너지를 의미합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학습을 통해서 체감·체득·체인한 바로는 혼(魂)은 개체생명의 근원적 생명력=생명에너지이고 영(靈)은 개체생명 사이나 개체생명과 우주생명 사이에 작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자각할 수도 있고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간발적(間發的) 생명력=생명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성은 특히 개체생명과 개체생명, 개체생명과 우주생명의 상관연동을 자각·각성·체득할 때 일어나는 일인데 양쪽 사이에서 품어 안고 넘어서는 역동(力動)=근원적 생명력의 발현·발동·발휘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혼’은 ‘입자’, ‘영’은 ‘파동’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은 스칼라(scarla=크기와 양은 있으나 방향이 없는 힘의 모습)로, ‘영성’은 벡터(vector=크기나 양과 함께 방향도 갖춘 힘의 모습)로 이해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저는 영성을 마음의 차원이 아닌 생명의 차원에서 파악하고자 합니다.


기타지마 기신 : 불교에서도 정토교에서는 아미타불을 ‘끝이 없는 빛’이나 ‘끝이 없는 생명(壽)’의 작용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빛과 생명은 둘이 아니고(不二) 무한의 작용이며 우리는 그것을 접함으로써 살아간다는 교리 해석이 됩니다.


김태창 : 기타지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아미타(阿彌陀)’는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amitāyus, 무한생명=無量壽) 또는 아미타바(amitābha, 무한광명=無量光)를 음역한 것으로 저 자신은 이것을 ‘우주생명’ 또는 ‘우주적·근원적 생명력=생명에너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생명에 대한 자각이 없습니다. 개체생명이 생명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런 상태를 가리켜 무명(無明)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즈키 다이세츠가 특히 일본의 영성화를 신생일본의 올바른 길로 제시했던 것은 그 당시 일본에서는 우주생명이 천황을 통해서 현현(顯現)되기 때문에 천황을 위해서 죽는 것이 생명의 최고 가치라는 잘못된 생명관을 시정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아프리카의 ‘우분투’, 이슬람의 ‘타우히드’, 일본의 ‘무스히(産靈)’, 한국의 ‘한’, 중국의 ‘다오(道)’,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각각 나름대로 영성의 작용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영성은 생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것이기보다는 생명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이른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차원에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우분투라면 “당신이 있으니까 내가 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김태창 : 서양철학은 생각을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을 중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식 존재론 또는 존재인식론이지요. 그것과 대비해서 동양철학, 특히 '한'철학은 생명자각론 또는 자각생명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어적으로 이야기하면 “살아 있어야 깨닫고 깨달으면서 살아야 제대로 산다”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삶과 깨달음이 동시발생·동시변행·동시소멸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동감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자각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스스로 뚜껑을 닫고 일상성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개신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김태창 : 개체생명의 테두리 안에 갇혀 과거와 현재에 얽매여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개체생명이 우주 생명의 작용에 제대로 공진(共振)·호응(呼應)·교향(交響)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어쨌든 우주생명과의 상관연동을 제대로 깨닫자는 것은 바로 그렇게 되었을 때 개체생명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일체의 굴레와 속박을 벗어나서 참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신란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중시합니다. ‘보이는 것’에는 환영도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진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김태창 : 그래서 불교는 ‘문법(聞法)’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들을 문(聞)’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깃든 진리=법의 소리를 듣는다기보다는 우주적·근원적 생명(력)의 율동·고동·파동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대화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서 늘 ‘문법치우(聞法値遇)2’라는 마음 자세로 남=타자의 발언에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법=진리’도 실체라기보다는 ‘작용’이니까요.


김태창 : 중국어의 ‘쯔(知)’는 원래 “활을 당겨서 화살이 맞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본어의 ‘시루(知る)’는 ‘領る’라고도 쓰는데 “상대방을 동화시키거나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그 사례가『 고사기(古事記)』에 있습니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자신의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시라시메루(領らしめる),’ 즉 ‘다스리게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곧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마테라스의 후손들이 대대로 지배하는 곳임을 마음에 새기라는 의미입니다. 한국어의 ‘알다’는 말은 ‘앓다’ 라는 말과 뿌리가 같습니다. 자기 몸으로 앓아보지 않으면 그 아픔을 알 수 없다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한국어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신체지(身體知)·생명지·체험지의 언어라는 특색이 있다는 지적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그렇게까지 다르군요.


김태창 : 아프리카에서 우물을 팠을 때 함께 고생하면서 일체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 제가 좋아하는 혜은희의 ‘사랑해’라는 노래를 간단한 멜로디로 편곡해서 함께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어느 날,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에서 우연히 만난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여학생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 다. “엄마한테 배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을 알게 되었고 한국에 오고 싶어져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반가웠습니다. 젊은 시절에 고락을 함께 하는 봉사활동을 통해서 만난 분의 따님이었던 것입니다. 함께 고생한=아픔을 나눈 기억과 인식이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세대를 넘어서 계승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여학생과의 만남이 저 자신의 과거의 행위와 그것을 통해서 생긴 공감의 유대를 새삼 실감하게 해준 것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우분투’식으로 말하면 “당신이 있으니까 나도 있다”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인연이다”라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야마모토 교시 : 일본어의 ‘시루’에 해당되는 한국어의 ‘알다’가 ‘앓다’와 연관된다는 말씀에 대해 좀 더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일본어의 ‘이타무(痛む)’는 몸이 ‘아프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다’, 가슴이 ‘아프다’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어의 ‘아프다’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요?


김태창 : 일본어의 ‘이타무(痛む)’는 자기 혼자의 내면적인 차원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서 한국어의 ‘아파하다’는 ‘함께 아파하다’는 뜻으로 자타상관의 차원이 중시된다는 어감의 차이가 있지 않는가, 라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느낌입 니다. 그리고 일본어의 ‘이타무’가 ‘알다’와 어원적으로도 어감상으로도 서로 연관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이 겪었던 아픔=몸과 마음과 넋의 아픔을 함께 경험하고 서로 알아간다는 것에 일본인은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영어에는 ‘컴패션(compassion)’이라는 말이 있지요. 산스크리트로는 ‘카루나(karunā)’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한국어의 ‘아파하다’와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동일본대지진의 참화를 보고 사람들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지요. 이것은 ‘카루나’를 매개시킴으로써 “상대방과 아픔을 함께하는 것”과도 관련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의 자비(카루나)’는 우리가 슬퍼서 울고 있는 곁에서 부처님께서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그러한 부처의 구원과도 상통하는 말이 한국어의 ‘알다’의 밑바탕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군요.


김태창 : 영어나 프랑스어의 ‘컴패션(compassion)’은 말 그대로 ‘함께(-com) 아파하다(passion)’라는 의미를 기본으로 하는 말입니다. 또 산스크리트어의 ‘카루나’는 타자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없애주려는(拔苦) 마음씨를 뜻하고, ‘마이트리(maitri)’는 타자에게 이익이나 안락을 주려는(慈悲) 마음자세를 뜻하는 말로 불교의 기본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죠?


야마모토 교시 : 기(氣)가 서로 통하고 있네요.


김태창 : “기가 통한다”는 것은 심기(心氣)·생기(生氣)·영기(靈氣)가 상통(相通)한다는 것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너하고는 기가 맞는다(気が合う)”는 것은 언어를 초월하고 있습 니다.


김태창 : 기타지마 선생이 말씀하시는 “기가 맞다”는 말을 “마음이 서로 통하다”라고 해석하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해와는 달리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체감으로는 ‘호흡(=생명력·에너지의 순환작용)이 딱 맞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래의 심학(心學)적인 언어만으로는 그 실상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어(의 차원)을 초월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자각적인 언어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언어포기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언어를 습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그런 의미에서는 ‘우분투’는 지금까지 말씀하셨듯이 생명론적인 이해를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태창 : 민족마다 각자의 역사 속에서 심화되고 공유되어 온 집합적 무의식의 축적과 역동에 다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각 민족의 언어 - 특히 토착어 -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맥락에서 언어에 대한 관심도 갱신·심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의 이해를 넘어서 그것을 체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을 통해서 자타상관의 민족간 상호이해가 몸과 마음과 얼이 아우러지는 단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국어로만 살고 있을 때에는 거의 무자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외국어를 써서 살아가야 할 경우에는 모국어와 외국어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단계에까지 나갈 수 있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제 경우에는 영어권과 일본어권에서의 생활과 철학대화 활동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니 필연적으로 언어에 대한 문제관심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예컨대 ‘자연(自然)’은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중국어의 ‘쯔런(自然)’과 일본어의 ‘지넨(自然)’은 약간 다릅니다. 신란은 만년에 이 ‘지넨’이라는 말을 써서 자기 사상을 표현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한어와 일본 고유어(和語)를 동시에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지요.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공생(共生)’이라는 말도, 그 말에 담겨 있는 일본인 특유의 무의식과 의식은 상생(相生)이라는 말에 담긴 한국인의 무의식과 의식과 서로 비교해서 생각해 볼 경우에 비로소 그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지요.


김태창 : 지금 말씀하신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중국에서는 ‘군생(群生)’이 상대적으로 강조된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모여 살고, 떼 지어 살고, 뭉쳐서 사는 생활방식이 두드러진 것처럼 제 눈에는 보였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고 서로 살린다는 의식은 별로 뚜렷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신란은 [정신염불게(正信念佛偈)]에서 ‘군생’이라는 말을 세 번 썼는데, 그것은 모두 부처님에 의해 구원받아야 할 ‘중생’을 의미하고 무자각적인 무리를 뜻하기 때문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중국에서의 의미와 똑같습니다. 그러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공생’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김태창 :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에서 말씀드립니다만 ‘독생(獨生)’ 지향성이 강 하다고 느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주석 

1) 툇마루: 일본어로는 ‘엔(緣)’이라고 하며, 본당과 마당 사이에 있는 복도를 말한다. 

2) 문법치우(聞法値遇): 모처럼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아주 값진 만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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