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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3. 2018

유학(儒學), 어떻게 할 것인가

인문학이야기 - 2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제71호, 2017년 1/2월 합병호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가 던진 화두 


최근에 번역서가 출판된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가 우리에게 던져준 가장 큰 화두는 ‘주자학과 한국사회’라는 진부하면서도 낯선 물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그동안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러나 당연히 물음을 던졌어야 했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자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 준 것이다. 

 

이와 유사한 물음은 이전에도 한국 학계에서 종종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학자들만의 담론에 머물렀을 뿐, 일반 대중의 차원으로까지는 내려오지 못했다. 반면에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일반 시민들에게 ‘주자학’이라는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점은 실제로 내가 지난 1월 18일에 시민독서모임인 ‘독창(讀創) 클럽’에 참여해서 확인한 바이기도 하다. 거기에 모인 분들은 하나같이 “이 책을 읽고 유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이 주자학의 나라라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이런 사실을 알려준 저자에게 감사드린다”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 서적에 비견될 수 있다. 연구실에 갇혀 있던 인문학을 시민들도 알 수 있는 언어로 풀어놓은 대중서가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 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문학 베스트셀러들 중에 ‘한국’을 대상으로 하는 책은 거의 없다. 대개 중국이나 서양 인문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한국의 경우에는 과거의 역사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이 외에도 자기 계발서나 경영서 등을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국이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그러면서도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인문학 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리’는 어렵고 ‘성리학’은 낯설다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주자학 입문서 내지는 유학 입문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기존의 대학 교재 같은 개설서가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으로서의 주자학이나 유학을 말해줄 수 있는 책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하에 이 글에서는 주자학적 사유방식, 더 넓게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리’ 개념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유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을 제시 하고자 한다.


자연과 인간의 접점으로서의 ‘리’ 

 

고대 중국 문헌에 나오는 ‘리’의 가장 원초적인 의미는 ‘결’이다. 즉 옥의 결이나 피부의 결과 같이 타고난 자연스런 무늬를 가리킨다. 그래서 리는 영어로 ‘패턴’이라고도 번역되고, 이후의 주자학에서는 ‘자연지리(自然之理)’라고 하였다. ‘자연지리’는 직역하면 “원래(自) 그러한(然) 결(理)”이라는 뜻이다.

 

‘자연지리’는 ‘천리’(天理)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천’은 ‘자연’을 가리킨다. 가령 [장자]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 이야기에서 포정은 문혜군 앞에서 신들릴 정도의 칼솜씨를 뽐낸 후에, “소의 살에 나 있는 천리(天理)에 따라 칼질을 하니 칼날이 17년 동안 손상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때의 ‘천리’가 이후의 주자학에서 말하는 ‘자연지리’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주자학에서도 ‘천리’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리’는 명사뿐만 아니라 동사로도 쓰이는데, 이 경우에는 “결대로 자르다”는 의미가 된다. 예를 들면 또는 주나라 초기의 노랫말을 모아놓은 [시경]에는 “我疆我理(아강아리)”라는 말이 나오는데(<小雅> <信南山>), 여기에서 ‘疆(강)’과 ‘리(理)’는 각각 ‘구획하다’, ‘나누다’는 의미의 동사로 쓰인다. 또한 청나라의 단옥재는 ‘理’의 사전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治玉也”라고 하고 있는데([설문해자주]) , 여기에서 “治玉也”란 “옥을 가공하다” 또는 “옥을 자르다”는 뜻이다.1


이처럼 ‘리’라는 말에는 ‘결’이라는 자연성(自然性)의 의미와 함께 인간이 “(결대로) 자른다”고 하는 인위성(人爲性)의 의미도 있다. 그래서 ‘리’에는 인간의 ‘선택’이 개입되게 된다. 왜냐하면 옥을 자르는 방식은 단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인이 옥을 가공할 때에 옥의 타고난 결대로 잘라야 옥이 손상되지 않지만, 그 자르는 방식은 가공자의 ‘목적’이나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소를 자를 때에 소의 (살과 뼈와 근육의) 결대로 잘라야 칼날이 손상되지 않지만, 자르는 방식은 자르는 사람에 따라 취향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리’라는 말은 자연(사실)과 인간(가치)의 접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2 이러한 사실은 현대어의 ‘리발’이라는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리발(理髮)이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다듬다”는 의미와 함께 “고객의 취향에 따라 자르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서양적인 ‘헤어디자인’은 인위성이 강조되어 자연에 상관없이 “인공적으로 만든다”는 의미가 강하다. 

 

한편 ‘리’는 ‘자르다’, ‘나누다’, ‘가공하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후대에는 ‘다스리다’(治)는 의미로도 쓰이게 된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치국(治國)’ 대신에 ‘리국(理國)’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리국’이라는 개념은 중국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리국(理國)’이란 말에서 정치(治國)가 “인간의 자연적 본성(理=性)에 따라 사회를 분절하여(理=禮) 백성들을 교화하는(理=敎) 행위”로 이해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리(理)가 없다 

 

이처럼 ‘자연스런 결’ 또는 ‘결대로 자르다’는 의미로 출발한 ‘리’가 이후에 점차 철학적인 어휘로 쓰이게 되면, 자연의 ‘원리’나 ‘법칙’ 또는 그것에 의해 사회를 ‘나눈다’, ‘분절한다’3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는데, 주자학의 리기론, 더 넓게는 성리학 전반에서 말하는 ‘리’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가령 주자는 ‘리’를 설명하면서 “소에게서는 소가 태어나고 개에게서는 개가 태어나는 것이 ‘리’이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 ‘리’는 자연법칙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용례는 우리말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표현이 그런 예이다. 우리는 자연법칙이나 일반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 말로도 바꿔 쓸 수 있는데, 그것은 ‘리’에 ‘까닭’이나 ‘이유(理由)’라는 의미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개에게서는 개만 태어나는 ‘이유’는 그런 ‘법칙’이 원래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자학이 자연과학과 다른 것은 이런 리 개념을 인간의 영역에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 도리(道理)나 사리(事理) 또는 윤리(倫理)와 같은 개념이다. 이 개념들은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道), 행해야 할 규범(事), 또는 사회관계의 질서(倫) 등을 모두 ‘리’, 즉 자연의 영역에 근거해서 규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행위와 사회의 규범을 ‘리’라는 자연성에 입각해서 분절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상식이나 통념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때에도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한다. 가령 평소에 착해 보이는 사람이 부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욕설이라는 행위가 사회에서 정해진 영역(分)을 넘어서 사용되고 있는데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다. 이처럼 주자학에서는 ‘리’를 자연과 인간의 영역에 모두 사용하는데, 그것은 ‘리’가 처음부터 두 영역에 걸쳐 있는 개념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중국철학의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의 갈림길 


문제는 이 행위규범으로서의 ‘리’가 ‘리’ 같아 보이지 않는 영역, 다시 말하면 자연의 영역으로 보기에는 애매하거나, 정반대로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영역에까지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자연과 도덕의 불일치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 흔히 비판되는 유교의 남녀 차별이나 서열화 등의 문제이다. 

 

가령 남녀가 따로 있는 것이 리인가(남녀칠세부동석), 아니면 같이 있는 것이 리인가? 부부가 집안일과 바깥일을 나눠서 하는 것이 리인가(夫婦有別)4 아니면 함께 힘을 합해서 하는 것이 리인가? 또는 정반대로 역할을 바꿔서 하면 리가 될 수 없는가? 양반과 쌍놈이 한상에서 밥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리인가, 아니면 “인간을 사랑하라(愛人)”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양반 쌍놈 할 것 없이 사이좋게 함께 먹는 것이 리인가? 중국 글자를 유일한 문자라고 숭상하는 것이 리인가, 아니면 자국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이 리인가? 

 

부모의 재산을 아들에게 더 많이 물려주는 것이 리인가 아니면 성별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물려주는 것이 리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에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이 리인가 아니면 나이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리인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12세기 주자가 정한 예법 그대로 지내는 것이 리인가 아니면 교회의 목사님이 정해준 추도식으로 하는 것이 리인가? 등등. 

 

이런 물음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제기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이중의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학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 진지하고 현실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유학이 페미니즘의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젊은이들에게 ‘성인군자’라는 비아냥을 받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날의 유학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유학이 현대화하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현대화할 수 있으면 사는 것이다.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가 주는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현대 한국인들에게 유학/주자학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킴으로써 기존의 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유학의 현대화’의 가능성을 ‘아래로부터’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유학이나 주자학을 철저히 외면해 왔던 시민들이 그것의 가치나 중요성에 눈을 뜨게 함으로써, 유학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도덕의 재인식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의 유학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할 때 피해갈 수 없는 문제 중 하나가 ‘도덕’이다. 오늘날 ‘도덕’이라고 하면 대부분 ‘윤리’의 다른 말로, 사회에서 정해진 행위 규범이나 개인 양심의 차원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통시대의 도덕은, 가령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덕’은 그보다는 훨씬 스케일이 큰 개념이었다. 그것은 우주론적인 차원의 개념으로, 우주는 만물을 생성하는 원리(‘도’)와 그것을 길러주는 힘(‘덕’)을 가지고 있고,5 인간도 이러한 우주의 도와 덕의 원리와 작용을 본받아야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시대의 도덕 개념이었다. 


그리고 주자학의 천리(天理)나 인(仁) 개념도 이러한 우주론적 차원의 도덕 개념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자는 유학의 궁극적인 도덕인 ‘仁’(사랑)을 우주(天地)가 만물(物)을 낳는(生) 마음, 즉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의 발현이라고 해석하였다.6 그리고 그것을 마음의 덕(德)이자 사랑의 리(理)라고 규정하였다.7 공자나 맹자와 같은 고대 유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의 차원에서만 논의되었던 ‘인(仁)’이 주자에 와서는 우주론적인 차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누구나 사랑의 원리로서의 ‘인(仁)’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설정된다. 다만 오랑캐나 동물은 ‘기’가 탁해서 ‘리’가 잘 발현되고 있지 않을 뿐이다. 마치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욕망이라는 ‘기’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으면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도덕 개념은, 오구라 교수가 지적하였던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도덕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라는 제한된 틀을 넘어서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린 ‘도덕’이다. 그래서 전통시대의 도덕은 ‘규범’이나 ‘시비’의 의미보다는 ‘성찰’이나 ‘수양’의 의미가 강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수도’(修道)나 ‘수덕’(修德)이라는 개념으로 남아 있다. 전통 유학에서의 ‘수도’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수기(修己), 즉 자기의 몸과 마음을 우주적인 공공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그 경지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러한 우주도덕의 차원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이나 공격에 앞서 이해와 포용이 선행되기 마련이다.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이다”라는 이분법적인 인식이 아니라, 선악의 판단이 내려지기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도’ 의 차원에서 사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늘상 거론되는 여러 갈등들도 이러한 ‘도덕’의 차원에서 풀어 가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사회과학적인 해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인문학적인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인 ‘리’유이다.

관계의 재설정 


‘도덕’의 문제와 더불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개념은 ‘관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학을 유학이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맹자가 말한 ‘오륜’이다. 오륜(五倫)이란 “다섯 가지 사회적 관계”(five social relationships)라는 의미로,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그리고 친구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데, 유학은 이 다섯 가지 “사회적 관계를 실체화하였다”는 데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 

 

그래서 주자의 선배에 해당하는 정씨 형제는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천하의 정리(定理=정해진 윤리)여서, 천지 사이에서 도망갈 곳이 없다”8고까지 말하였다. 이처럼 인간관계를 특정 유형으로 절대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사회제도와 규범을 설정하는 것이야말로 유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9 

 

그런데 유학의 오륜은 한편으로는 인간관계의 제약이기도 하다. 다섯 가지 유형이 일견 보편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면 그 외의 다른 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인간관계가 복합적이고 다양해지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현대 산업사회 또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또는 기업과 고객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해지고 있는데 이 관계는 유학의 오륜에는 들어 있지 않다. 또한 오륜의 내용에 있어서도 재해석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는데, 가령 오늘날과 같이 세대 간의 갈등이 자주 거론되고, 그 주된 원인이 불통(不通)에 있다고 한다면, ‘부자유친(父子有親)’보다는 ‘부자유통(夫子有通)’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또는 지난 정부처럼 통치자의 불통(不通)이 화근이 되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경우를 보면, ‘군신유의(君臣有義)’보다는 ‘군민유통(君民有通)’이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니면 모든 인간관계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덕목을 ‘인(仁)’이 아닌 ‘통(通)’으로 설정하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부부유별’의 경우에도, 현대사회와 같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활발해지고 있고, 가정 살림이나 자녀 육아를 부부가 서로 도와서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부의 역할을 구분한다는 ‘부부유별(夫婦有別)’보다는 부부가 서로조 화된다는 ‘부부유화(夫婦有和)’나 부부가 서로 협력한다는 ‘부부공공(夫婦公共)’10 같은 개념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여성의 역할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는 ‘여성’이다. 전통시대 유학에서는 여성의 존재가 철저히 배제되었다. [논어]에서 여성의 역할은 찾아볼 수 없고, 여성에게는 ‘현모양처’ 이상의 역할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는 남성이 독점하고 있던 정치 영역에서조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 소형화됨에 따라 전통적인 대가족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되었던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안주인으로서의 역할도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反유학적인) 현실과 유학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오늘날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저출산이나 결혼 기피 현상도 유교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유교사회에서는 그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리’(當然之理)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그 당연함에 대한 극단적 반발로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젊은 여학생들이 일본과 같은 외국에 나가면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고 다니는 것과 유사하다. 당위가 지나치게 강하니까 사회 환경이 바뀌자 그것에 대한 반발도 그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학의 현대화 또는 현대유학의 하나의 과제로서 ‘여성유학’이라는 새로운 ‘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관점에서 유학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행해지지 않고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과 문제들도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의 상당수는 전통적(=유교적) 세계관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의 갈등과 충돌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을 알아야 한국이 산다 


오래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공자를 알아야 나라가 산다”고 바꿔 말하고 싶다. 이것은 유학을 무조건적으로 계승하자는 뜻이 아니다. 유학을 제대로 알아야 유학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유학의 본질을 모르고서는 유학을 없앨 수도 계승할 수도 없다. 계속 애매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전통’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서구적인 근대화가 어느 정도 성취된 지금, 그리고 그것의 한계가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는 오늘, 다시 한 번 전통으로 돌아가서 양자를 융합하고 회통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새로운 동력’은 항상, 적어도 인문학의 영역에서는 이런 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주석

1) Brook Ziporyn, [Beyond Oneness and Difference : Li理 and Coherence in Chinese Buddhist Thought and Its Antecedent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13, pp.26~8. 

2) Li is here “cutting in a way which is consistent with both the topography and human value,” or the overlap of the two. 위의 책, pp. 27-8. 

3 오구라 기조는 “(성리학의) 리는 분절화이다”라고 정의한다. 小倉紀蔵, [朝鮮思想全史], 筑摩書房, 2017, 146-7쪽. 

4 ‘부부유별’의 의미에 대해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터넷판)의 ‘삼강오륜’에 나오는 다음의 설명을 참조하였다: “남편과 아내는 분별 있게 각기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5 道生之, 德畜之. ([도덕경] 제51장) 

6 仁者天地生物之心. (주자 <인설(仁說)>) 

7 仁者, 心之德, 愛之理. (주자, [맹자집주] <양혜왕장구(상)>) 

8 父子君臣, 天下之定理, 無所逃於天地之間. ([河南程氏遺書] 권5 [二程集(一)] 77쪽) 

9 반면에 유학에 비판적이었던 노자나 장자는 ‘오륜’이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고(즉, 관계의 실체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불교의 경우에는 해탈을 위해서는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까지 본다. 

10 여기에서의 ‘공공’의 의미는 김태창의 ‘공공(하는)철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김태창은 전통시대 동아시아 고전에 나오는 “모두가 함께한다”는 의미의 동사로서의 ‘공공’ 개념에,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여 미래를 연다”고 하는 현대적인 의미를 가미하여 ‘공공’ 개념을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김태창 구술·이케모토 케이코 기록·조성환 번역, [공공철학대화], 모시는사람들, 20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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