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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30. 2018

개성 방면의 도덕률과 수심정기

다시 읽는 신인철학 - 76

야뢰 이돈화 지음, [신인철학] 연재 | https://goo.gl/vKaRhD (이돈화) 


[제1편 우주관 / 제2편 인생관 / 제3편 사회관 / 제4편 개벽사상]

제5편 도덕관

         제1장 도의존재가치

         제2장 자연의 도덕

         제3장 인간계의 도덕..............(이상 지난호)


제4장 수운주의의 윤리적 도덕률     


1. 개성 방면(方面)의 도덕률과 수심정기(守心正氣)

  


수운주의의 윤리적 도덕률을 개성의 방면에서 관찰한다면 수운은 일찍 ‘수심정기(守心正氣)’4자(四字)를 ‘유아지경정(唯我之更定)’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거니와, 개인의 정신적 방면에 있어서는 수심정기가 곧 그의 도덕률의 최고행위가 되는 것이다.

  

대개 사람성이 사회와 관계하는 가운데 정서(情緖)와 같이 가장 큰 영향을 생활에 주는 것은 없다. 정서는 개인의 자율적 화복(禍福)을 좌우하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조건이 되어있다. 희로애락, 우수(憂愁), 사려(思慮) 같은 정서가 그 개성의 인격과 얼마나 중대한 관계가 있으며 그가 또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 볼 때 정서에 대한 ‘치중화(致中和)’는 도덕률에 대한 더 할 나위 없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서는 다만 정서만으로 중화(中和)를 얻지 못하며 또한 도덕률이 되지 못하고 정서 위에 의지의 힘을 가하여 정서를 절제하며 미화하며 융화케 하는데서 아름다운 도덕적 인격을 얻을 수 있는바, 이제 정서와 의지의 합일로 생하는 인격적 도덕률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면

  

첫째, 사람은 도덕상 의지에 있어 근기(根氣)라는 것이 만사행위(萬事行爲)의 기초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상근기(上根氣) 중근기(中根氣) 하근기(下根氣)라 하여 근기의 고하로서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있거니와, 성공의 기초는 지력보다 정의(情意)의 합치력(合致力)인 근기가 그의 근본이 됨은 우리가 일상행위에서도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근기가 있는 곳에 극기(克己)가 생기고 극기가 있는 곳에 모든 정서적 절제가 있는 것이다.

  

둘째, 극기이니 희로애락을 적당히 절제하여 내계(內界)와 외계(外界)에 조화를 얻는 데서 유쾌를 느끼며 사리(事理)의 형통을 얻을 수 있는 도덕상 행위이다. 그런데 극기는 본래 의지의 전제로 된다기보다 도리어 본능의 조절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 예를 들면 성욕과 식욕 같은 데도 얼마만치 천연적 절제가 있으며 기타 모든 생리적 본능에도 천연적 절제가 있으므로, 극기의 공부는 본성 순응의 공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왕왕 본성의 절제를 초과하여 과분의 행위를 취하게 되는 데서 극기의 공부가 생기는 것이다.

  

셋째, 의기(義氣)의 행위이다. 의기의 행위는 극기로부터 나오는 동시에 또한 모든 정서의 미화 혹은 초기로부터 생기는 인간의 도덕이다. 그리하여 의(義)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는 행위에 이르러서는 인간성의 최고행위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는 어떤 시대에든지 통용되는 것이다. 요컨대 개인의 정서에 대하여 완급(緩急) 공히 그 중화를 얻고자 하면 아무리해도 극기 근기(根氣)적 절제를 요하게 되는 것이 필요한 행위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수운주의는 이러한 도덕적 본원을 ‘수심정기’에 귀납케 하여 수심정기로 개성수련(個性修煉)의 최고행위를 삼았다.

  

‘수심정기’라는 형식적 어구에 있어서는 결코 수운주의 수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그러한 어구는 불교에도 있고 유교에도 있다. 불교에서는 성명의 본원을 지키기 위하여 애착을 심히 배척하였다. 사람의 생로병사, 희로애락, 애별이고(哀別離苦) 등의 사고팔고(四苦八苦)는 다같이 인식에 원인하였고 인식은 다시 애착을 유인(誘引)하는 본원이라 하여, 인식의 절멸(絶滅), 공관(空觀)의 실현으로 도덕상 행위의 근저를 삼는 것이다. 유교에서도 외계의 물욕이 인간성의 본선(本善)을 막는다 하여 물욕심(物慾心)의 발동을 막는 것이 도덕상 행위라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해탈의 원리를 말하고 유교에서는 극기공부(克己工夫)를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현대의 도덕이 아니며, 자연의 원리에 저촉되는 점이 있다. 사람도 한 동물인 이상 본능인 애착이 없을 수 없고 또 물욕심의 발생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설사 이것을 실행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천백인(千百人)에 한 사람이 있을 뿐이요 보편적 도덕이 될 수 없으며 소극적 도덕뿐이오 적극적 도덕이 아니다. 수운주의에서 이른바 ‘수심정기’의 수련은 단지 소극적 의미를 표준한 것이 아니며 또는 물심(物心) 어느 한편에 치우친 수양(修養)도 아니오 모든 것을 인간격 중심에 귀납케 하여 인간격의 향상과 발전을 도모하는 것으로서 그의 모적을 삼는 도덕률이다. 이제 그 요령을 들면

  

첫째, 인간격 중심의 수련은 인간을 비열한 동기로부터 해방코자 하는 것이 그의 중심사상이니, 이상에서 우리가 여러 차례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은 대개 두 방면의 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는 의식주의 생활 즉 경제적 생활이요, 하나는 문화적 생활 즉 인격적 생활이다. 전자는 신(身)에 속한 것이요 후자는 정신에 속한 것인바 문화적 생활은 곧 인간을 비열한 동기에서 구제(救濟)하는 생활이다. 참된 인간은 동물성으로부터 초월하여 인간성의 특유한 우주생활(宇宙生活)에 참여함을 이름이다.

  

우주생활이란 무엇이냐? 우주 자체가 개벽 이래로 자존(自存) 자율(自律)의 생활을 개시하여 필경 인간격 생활에 이른 계통을 말하는 것인데, 우주생활은 인간생활에서 맹목적 생활로부터 정신적 자각생활에 들어섰고 인간은 이 우주생활의 정신적 자각에 의하여 비교적 높은 계단에 달하게 된 것이라 함은 전편에 기술하였거니와, 도덕적 의미에 있어서의 목적은 사람을 우주생활 즉 인간격 최고생활에 참여케 하는 것이며 인간의 진목적(眞目的)을 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람을 인간격 최고생활에 참여케 하는 증거에 대해서는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라 향상하면 향상할수록 발전하게 된 동물이요,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타락하게 된 동물이므로 이것이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점이 되는 동시에 또한 사람에게 가장 놀라운 점이 되는 것이다. 사람 중에는 남양만인(南洋蠻人)과 같이 동물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동시에 문명인과 같이 문화의 생활을 하는 구별도 있으며, 같은 문화인이라 할지라도 저급의 동물적 행위를 하는 동물성의 인간도 있는 동시에 극히 고급적인 창조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물론 생리적 구별도 있을 것이나 대개는 인격적 노력 여하에 원인이 크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인간과 인간격은 근본에서 다른 것이다. 인간격은 우주생활의 일부인 고급생활이요 인간은 우주생활의 인간격에 참여코자 하는 고급의 동물이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이 인간격에 참여하는 생활이 곧 수운주의에 도덕률이다.


인간으로 인간격에 참여하는 생활에는 생명의 약동(躍動)을 일으키는 주의가 있어야 한다.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수심(守心)은 곧 주의의 파지(把持)를 이름이요, 주의의 파지는 곧 원력(願力)의 실현을 말함이다. 마음 가운데 대원력(大願力)의 주의를 세운 사람은 희로애락이 들지 아니하며 생로병사가 침범치 못한다. 비유하여 말하면 큰 기쁨이 발동되면 적은 기쁨이 일어나는 법이 없고 큰 무서움이 발동할 때에 적은 무서움이 동(動)치 못한다. 천리타향에서 고향인을 만난 사람에게는 여간한 기쁨이 그 속을 움직일 수 없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대호(大虎)를 만난 사람에게는 여간 무서움이 그 마음을 동치 못하고 삼대독자를 죽인 사람에게는 여간 설움이 그 애정(哀情)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음속에 대원(大願)을 품고 사는 사람일 것 같으면 모든 적은 욕망, 모든 적은 희열은 그 대원 앞에 항복(降伏)하고 마는 것이다. ‘도래삼칠자(圖來三七字)하여 항진세간마(降盡世間魔)’라고 한 것은 곧 이를 이름이다. 대원은 곧 대주의(大主義)이다. 그러므로 수심이란 말은 주의를 지키라는 말이요 주의를 생명화하란 말이다. 주의와 생명을 일치케하는데서 모든 희노애락 우수(憂愁) 사려(思慮)의 정서를 가장 잘 조화하고 가장 잘 통일 할 수 있다. 주의는 ‘종대’(枠)가 되고 정서는 양륜(兩輪)이 되므로 모든 정서는 주의에 의하여 통일 되고 조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주의의 선택이 문제다. 광범한 의미로 말하면 모든 것이 주의 아님이 없은즉 어떠한 내용을 가진 주의라야 그가 곧 생명화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거기에는 ‘시대정신(時代精神)과 짝하여 나아가는 창조적 희열이 충만한 주의가 아니면 안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에 있어 모든 사람이 적으나 크나 어떤 욕망을 가슴 가운데 품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혹은 쾌락 혹은 명리(名利) 혹은 권리사용(權利使用) 등의 욕망의 줄이 그 개성을 몰아 일야영영(日夜營營)히 살아나아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욕망은 정서를 조화하는데 한 가지도 도움이 없음을 경험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한 창조적 희열이 없는 욕망은 그 순간에서 다시 그 욕망과 짝하는 모순과 고통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러한 세간적(世間的) 욕망을 절대 배척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잡다한 욕망은 어떤 대욕망와 대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일어나고 우연히 생기며 필연으로 기복(起伏)하는 생리 혹은 심리상태의 결과임으로써 우리는 그를 순수(順受)하여 소화(消化)하며 도피(逃避)하며 선택하여 순류(順流)의 기로(岐路)를 개척할 뿐이다. 요컨대 창조적 주의는 목적이 되고 공리적功利的 욕망은 그 목적의 과정에서 송영봉별(送迎逢別)하는 역참(驛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생명의 전적 희열인 창조적 주의를 살리는데서 영원의 희열 속에 묻힐 수 있고 그리하여 창조적 희열의 열화(熱火) 속에서 모든 불결 잡다의 정서가 연소되고 세척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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