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편 (3)
장흥 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이방언의 행적을 통해 대변된다. 이방언은 1894년 봄, 전봉준의 무장기포 당시 이인환, 강봉수 등 장흥지역 지도자들과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 진영에 합류했다. 이방언은 장성 황룡전투를 진두에서 지휘하여 대승을 거둬 남도장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하지만 이방언의 장흥 지역 투쟁 활동은 석대들 전투 패배와 함께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민란시대의 투쟁적 전통이 이어졌다
장흥 지역은 1862년 대규모의 농민 항쟁이 있었던 곳이다. 보성군수를 지낸 고제환이 지역민들을 지도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농민을 수탈한 지방관을 내쫓은 일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방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장흥 지방에서는 1891년에 입교한 이방언, 이인환 등에 의해 동학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삼례 집회를 전후하여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장흥에는 어산접, 용반접, 웅치접 등 세 개의 접이 조직되었다. 이방언은 어산접의 접주로서 활약했다. 그 당시 50대 중반의 이방언은 가장 원로급 지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로서 그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보은취회와 장흥 동학교도 활동
장흥 지방 동학교도들이 신원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는 1893년 3월 보은취회 시기부터였다. 천도교 측 기록에는 장흥 지방에서도 보은취회에 수십 명의 동학교인들이 참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신원운동의 여러 단계를 계기로 장흥지방 동학 교세는 향촌사회 유생들의 조직적인 배척에 직면할 만큼 급격히 성장했고, 이듬해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는 강진 해남 완도 능주 등 전라남도 서남부 지방을 통괄 지휘하는 주력군이 될 만큼 발전하기에 이른다.
동학 지도자들의 입도 시기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활약한 장흥 지방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이름을 떨친 이인환, 이방언 등이 동학에 입문한 것은 1891년 무렵이었다. 추측컨대 장흥 지방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는 1880년대에 이미 익산 부안 지방을 중심으로 호남지방 에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동학 2세 교주 최시형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인환, 이방언 등이 해월의 은거지를 수소문하여 직접 찾아가 수도(受道)했거나 아니면 해월의 지도를 받은 전라도 출신의 동학접주로부터 수도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특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1차봉기 때, 장흥 지역 지도자들 활동에 나서
1894년 3월, 이방언은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장흥의 이인환 강봉수, 강진의 김병태, 해남의 김도일, 영암의 신성 등과 함께 3월 봉기에 참여했다.
특히 1894년 4월 23일에 벌어진 황룡전투는 황룡강을 사이에 둔 월평리 일대에서 전개되었는데, <금성정의록>에서는 황룡전투 당시 ‘장태’라는 새로운 무기가 사용되었으며, 장흥접주 이방언이 장태를 창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방언이 장흥 동학교도를 이끌고 동학농민군 본진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흥 동학농민군, 5월부터 집강소 설치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관군 측과 전주화약을 맺은 시기는 1894년 5월 7일이었다. 동학농민군 측은 자진해산 형식으로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완전히 해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동학농민군 측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동학농민군 대표를 선출하여 지방행정을 개혁하고자 했다.
전주화약 이후, 이방언은 장흥으로 돌아와 집강소 활동을 전개했다. 장흥 지방 집강소는 가장 먼저 용계면(龍溪面) 자라번지에 1894년 6월경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현재 부산면 김자리 효자마을 앞 들판이며, 앞의 형국이 자라와 같다고 하여 자라번지라 했다.
그런데 이 자라번지는 이사경 접주의 근거지로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그 조직적인 기반이 묵촌리 어산접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동학농민군들은 이곳 자라번지를 근거지로 하여 죄인이나 토호를 잡아다가 징치하는 등의 집강소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박기현의 <일사(日史)>(갑오 7월 3일조.) 기록에 따르면 장흥 일대의 동학 동학농민군과 장흥 자라번지를 중심으로 하는 집강소의 폐정개혁 활동은 인근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7월초에는 강진현에서도 집강소를 설치했다. 강진현에 설치된 집강소 역시 장흥 자라번지 집강소와 대동소이한 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집강소는 하나의 군현에 하나의 집강소만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라번지의 집강소 외에 묵촌에도 집강소가 있었던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로 보아 1894년 6월경에 이방언은 장흥으로 돌아와 묵촌일대에 웅거하면서 그 일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흥 지역 집강소 활동은 여러 지역에서 전개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이방언 대접주의 지휘 아래 이인환, 이사경 등의 접주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사경 접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장흥 부산면 용반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사경은 그해 6월경 용반마을 자라번지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이 집강소는 장흥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일사>에 따르면 “장흥군 부산면 자라번지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동학농민군이 죄 있는 사람을 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 도에 배치된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보좌관)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라고 기록하였다.
2차 봉기와 장흥 동학농민군 활동
제2차 봉기는 9월 13일 전라도 삼례에서 이루어졌는데, 장흥 지역에서는 이방언의 지휘 하에 5천명의 동학농민군이 기포했다. 그러나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제2차 기포 때 장흥을 떠나 삼례의 동학농민군 본 진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장흥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부사 박헌양은 7월 30일 장흥부사로 부임했다. 부임한 다음 날 바로 그는 향교에 행차하여 유림들과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을 상의했다. 이에 따라 수성군 측은 10월경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수성소를 설치하는 한편 7월 3일 동학교인을 체포하여 포살하는 등 강경한 탄압을 전개했다. 이것은 아마 제2차 기포를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함에 따라 취해진 움직임이었다.
장흥 지방 수성군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과 공세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 인근에 병영이 위치하고 있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필요한 병력과 무기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고, 장흥부 바로 앞에 800여 명에 달하는 역졸을 거느린 찰방(察訪)이 주재하는 벽사역(碧沙驛, 당시 벽사역은 속역으로 可申, 波靑, 楊江, 洛昇, 鎭原, 通路, 綠山, 別珍, 南利 역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이 있었고, 유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민보군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894년 11월, 장흥에 동학농민군 수천 명 집결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삼례에서 기포하여 북상하고 있을 때, 장흥 지방 동학농민군들은 10월 16일경부터 장흥 사창(社倉)을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여 11월 중순경까지는 장흥부 외각 지역 사창 웅치 회녕(보성군 회천면) 대흥(대덕읍) 등지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11월 말이 되자 그 규모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11월 25일에
대흥에서 이인환(李仁煥)이 기포했다는 기록이 그 예이다.
장흥 동학농민군의 주력은 묵촌의 이방언(李芳彦) 접주, 자라번지의 이사경(李士京) 접주, 웅치(장흥군 안량면과 보성군 웅치면사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를 중심으로 한 구교철(具敎轍) 접주, 고읍(관산)을 중심으로 한 김학삼(金學三) 접주가 이끄는 세력이 모여서 큰 군세를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1894년 9월말경에 기포한 것이 아니라, 전봉준군의 북상에 따라 그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장흥 동학농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공세를 가하던 강진병영과 장흥부의 수성군에 대응하기 위한 기포였으며, 그 시점은 10, 11월경이었다.
장흥 지역 중심의 동학농민군 파죽지제의 위세
이들 연합 동학농민군의 규모는 적게는 1만에서 많게는 3만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이들은 12월에는 열흘 동안 파죽지세로 연전 연승하여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강진 전라병영을 차례로 점령했다.
1만여 동학농민군은 벽사역과 장흥부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사역의 지방군은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나 버렸다. 동학농민군은 텅빈 벽사역을 점령하고 관청 건물과 역졸들이 살던 민가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어 장흥부로 쳐들어가 장흥부사 박헌양 이하 장졸 96명을 몰살시키면서 장흥부의 장녕성을 함락시켰다. 이 싸움 과정에서 강진, 해남, 영암, 순천 등지의 동학농민군이 계속 합세하여, 3만 명에 이르렀다.
연합 동학농민군은 1894년 말에 계속하여 강진현과 전라 병영의 공격에 나섰다. 강진의 관청을 불태우고 병영의 화약고를 폭발시켰으며, 저항하던 관군과 병영군을 전멸시킴으로써 다시 일어서는 전기를 맞는 듯했다.
동학농민군, 병영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나주를 목표로 삼다
동학농민군은 병영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토벌군 본부가 있는 나주성까지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벌군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전열을 정비하고자 그 해 말에 다시 장흥으로 돌아와야 했다. 전주와 장성을 거쳐 내려오던 중앙군과 일본군은 크게 세 방향에서 장흥을 압박해 들어왔다. 이두황이 지휘하는 중앙군은 순천 방향에서, 이규태가 지휘하는 중앙군은 나주와 영암 방향에서, 나주의 일본군은 영암과 능주 방향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왔다.
장흥 동학농민군, 관 일본군과 첫 접전
동학농민군과 토벌군 사이의 첫 전투는 불과 수십 명의 일본 토벌대 선발대와 수 천 동학농민군의 접전이었지만, 동학농민군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자울재를 넘어 관산 방면으로 후퇴해야 했다. 동학농민군은 다시 모여 3만 병력으로 장흥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관 일본군의 본대가 장흥에 도착해 있어서 전력이 강화되어 있었다.
광주 나주에서 퇴각한 동학농민군 일부 세력 장흥에 합세
전봉준군이 9월 삼례에 머물면서 북상을 위한 전력 강화에 주력하는 한편 광주에 머물러 있던 손화중 최경선 등에게 광주 나주 수성군의 공세에 대비할 것을 분담하게 된다.
그러나 손화중 최경선군은 11월로 접어들면서 나주 수성군 측과 몇 차례 싸웠으나 번번이 패했으며, 12월 1일에는 마침내 광주에서 후퇴하여 남평 능주 동복방면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일부는 장흥까지 후퇴했다. 광주 나주에서 퇴각한 동학농민군이 합류함에 따라 장흥 동학농민군의 군세는 대폭 강화되기는 했지만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리고 11월부터 12월초까지를 전후하여 광주 나주 동학농민군 외에도 남평 보성 능주 화순 등지의 동학농민군도 상당수 합류한 것으로 나타났다.
12월 초, 동학농민군, 장흥부 강진 병영현 대공세
12월 초부터 동학농민군은 벽사역, 장흥부, 강진현, 강진병영을 차례로 점령하는데, 여기까지는 동학농민군이 파죽지세로 석권하였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2월 1일 사창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12월 3일 벽사역과 장흥부 인근까지 진출했다. 이들 중에는 금구 광주 남평 화순 보성 등지에서 물러난 동학농민군 세력이 합세하고 있었으며, 장흥의 이방언이 이끄는 1만여 대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장흥 인근지방의 모든 동학농민군이 총집결하여 장흥부와 벽사역을 사방에서 포위하자 벽사역 찰방 김일원(金日遠)은 장흥부 성안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피신해 버렸고, 수성군 역시 벽사역으로부터 장흥부 안으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12월 4일 아침 빈 벽사역을 점령하고 각 공해와 역졸들이 살았던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벽사역을 함락한 동학농민군은 장흥부로 향했다. 찰방 김일원이 병영으로 말을 달려 병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병사 서병무는 비류들이 병영으로 육박해 오고 있어, 수군(守軍)을 파견할 수 없다고 하고, 초토영에 보고하라고 미뤘다. 그리하여 나주 초토영으로 보고한즉 초토영에서는 나주의 군병을 출동시키려면 대진(大陣)에 품의해야 한다고 하면서 역시 거절했다.
동학농민군이 벽사역을 첫 공격 목표로 잡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즉, 고부에서 첫 봉기가 일어났을 때 안핵사로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가 이곳 벽사역졸을 데리고 가서 고부 군민을 휩쓸었는데 이에 대한 응징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벽사역 함락에 충격을 받은 장흥부사 박헌양은 불리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수성 장졸과 부내 백성들을 독려하여 동학농민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흥부성은 예로부터 장녕성(長寧城)이라 불렸다. 주변 산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동쪽만이 평지이고 그 외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남쪽 방향으로는 남산이 솟아 있는데 남산은 탐진천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성벽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문쪽 평지 앞에는 탐진천이 흘러 천혜의 요새였다. 장녕성은 지금의 남외리와 장흥경찰서 일대의 장흥부 부성(府城)을 말한다.
장흥부 전투 과정
동학농민군은 장녕성을 점령하기 위해 성 주위를 에워싸고 12월 5일 새벽 총공격을 펼쳤다. 동학농민군 구성은 용산면의 어산접(접주 이방언) 1천여 명, 부산면의 용반접(접주 이사경) 5백여 명, 웅치접(접주 구교철) 1천여 명이 주력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천주 부적이 찍힌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주문을 외면서 인시(새벽3-5시)를 기하여 동학농민군의 일대는 우회 공격하였고, 주력은 정면에 있는 동문(지금의 장흥 극장자리)으로 쳐들어갔다. 죽창을 휘두르는 소리를 신호로 세 방면에서 총공격했다. 동문 쪽 동학농민군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수십 명이 거목을 들고 동문을 파괴하여 물밀 듯이 입성했으며, 동문이 열리자 이와 동시에 석대군은 남문에, 웅치접군은 북문에 입성하여 관아를 불태우고 아전집 3채 외 성내 집들이 거의 불탔다. 당시 부사 박헌양은 선회당에 있었는데, 동학농민군에 항복치 않고 그 자리에서 칼을 맞아 죽었다. 부사의 시체는 동문 밖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버려졌는데, 동촌에 사는 어떤 과부가 거두어 암장해 주었다 한다.
장흥성에 입성한 동학농민군은 바로 강진현과 병영 공격에 나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