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un 25. 2018

장흥 - 호남 서남부 지역 최대 격전지 장흥전투(하)

전라남도 편 (4)

[개벽신문 제74호, 2018년 5월호] 통일칼럼

채 길 순 | 명지전문대학교 교수


관 일본군과 최후의 대접전

병영이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함락되던 12월 10일, 나주의 관군은 미나미(南小四郞)의 지시에 따라 세 길로 나누어 강진으로 토벌전에 나섰다. 한 길은 영암 쪽, 다른 한 길은 장흥쪽, 또 다른 한 길은 능주 쪽이었다. 그러나 이규태군은 12일에야 강진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오게 되며, 일본군은 15일, 이두황군은 20일에야 장흥으로 들어온다. 이때 인근의 동학농민군은 남쪽으로 모여들어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장흥 남문 밖과 모정 뒷산에 주둔하게 되는데, 이날이 마침 동학농민군 토벌 임무를 띠고 내려온 경군의 선발대가 들어오게 되는 12일이다.



장흥 남문 밖과 모정에서 관군과 접전

12월 12일 남문 밖과 모정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13일 새벽 통위대 교장 황수옥이 이끄는 30명과 12일 밤늦게 장흥에 도착한 일본군과 1차 접전을 하여 동학농민군 20여 명이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다. 수천 명이나 되는 동학농민군이 30명의 토벌군선발대에 터무니없이 밀려 패한 것은 신식무기 때문이었다.



장흥 석대 들 전투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 일본군과 동학농민군 사이 최후 최대 사투를 벌인 곳이 장흥 석대들 전투이다. 장흥성에서 퇴각했던 동학농민군은 13, 14일 사이에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이루면서 장흥부를 다시 포위했다. 그러나 교도중대와 일본군이 장흥에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3만여 명의 동학농민군들의 최후 전투지인 석대 들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의미가 크다. 우금치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배를 안긴 일본군의 추적이 전개되는 중에 동학농민군이 최후 항전을 벌였다. 당시 장흥지역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이후 거듭되는 패배로 위축된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결사의 항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15일 동학농민군은 압도적인 병력에 의지하여, 관산 방향에서 자울재를 넘어 장흥성 앞의 석대들녘(지금의 장흥읍 남외리)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관 일본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석대들을 가득 메운 동학농민군을 향해 기관총 등의 신식 무기로 일제 사격을 가했다. 기껏해야 화승총과 대창, 몽둥이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뒤로한 채 자울재 너머로 물러나야했다. 이는 마치 통한의 우금치 전투 장면 같이 비참했다. 당시 전투상황을 <순무선봉진등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도중대가 잠시 쉬는 사이 뜻밖에 비류 삼만 명이 고봉아래로부터 북쪽 후록 주봉까지 산과 들 가득히 수십 리에 뻗혀 봉우리마다 나무사이로 기를 꽂고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며 포를 쏘아대며 날뛰어 창궐하니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요, 성내 부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아우성이었다. 일본군 중위와 상의한 뒤 통위병 30명으로 후록 주봉의 적을 막게 하고 교도병으로 성 모퉁이 대밭에 숨게 하고, 먼저 민병 수십 명을 내보내 평원으로 유인하게 했다. 그리고 양로에서 공격하여 나가니 적이 도망하여 20리 밖 자오현(자울재)까지 추격하다가 해가 저물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관 일본군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장흥성의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략을 짰고, 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옥산리에 재 집결, 최후 항쟁 벌여

동학농민군의 총이라고 해야 겨우 불을 붙여 발사하는 조총으로 20-30미터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죽창이나 몽둥이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자울재 너머로 통한의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울재 너머로 퇴각한 동학농민군은 17일에 또다시 옥산리에 재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여기서 다시 동학농민군 백여 명이 포살되고 20여 명이 생포되었으며, 19일 강진에서는 생포자 15명이 포살되었다. 이렇게, 장흥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던 동학농민군의 조직적 항전은 허망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패퇴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피신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고향마을로 숨어들 수는 없었다. 이미 유생들 중심의 민보군이 마을 마을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보군은 동학농민군을 체포하기 위해 장흥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과 한통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은 혹은 인근의 천관산 산속으로, 혹은 강진의 대구(大口), 칠량 방향을 거쳐 해남으로, 혹은 보성 회령 방향으로, 혹은 회진 등 바다 남쪽으로 숨어들었다가 배를 타고 섬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관군의 잔혹한 토벌 전 전개

한편 20일에는 우선봉장 이두황이 이끄는 경군이, 29일에는 출진참모관 별군관이 이끄는 경군이 장흥에 도착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함께 집집마다 색출하여 매일 동학농민군을 수십 명씩 잡아다가 장흥장대와 벽사역 뒤 저수지 둑에서 포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당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의하면 강진 부근에서는 320명, 장흥부근에서는 3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정토기록에 따르면 장흥 자오현(自吾峴)에서도 수백 명이 학살되는 등 곳곳에서 패주하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용산면 관산읍, 회진과 덕도, 대덕읍, 유치면 등 여러 학살 지역을 만날 수 있다.


회령성에서 바라본 회진과 덕도 : 이곳은 이인환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지였다


동학농민군 거점 용반리, 지도자는 처형되고 마을은 전소

용반리는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활동의 거점 지역으로, 인천 이 씨들의 집성촌이었다. 마을사람 대부분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이렇게 되자 토벌도 극심하게 이뤄졌다. 관 일본군에 체포된 용반리 동학농민군들은 벽사역에서 손이 뒤로 묶인 뒤 쌓아올린 짚단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불태워 죽였다. 처형된 시신은 혹독한 추위에 꽁꽁 언 채 방치 되었다가 가족들은 숯덩이 시신을 찾아다 장사지냈다. 당시 용반 마을은 300여 가구가 있었는데, 3가구만 남고 토벌군에 의해 모조리 불탔다. 이렇게, 용반 마을 사람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최근까지 이 마을에서는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합동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제례 준비는 이사경 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세근의 손자 이연기씨가 맡았다. 위패에는 장흥 용반 접주 이사경을 비롯하여 이호인 백인명 최진문 최승문 이원찬 최창업 이원종 이호의 이세근 이회근 이호신 이순근 이수공 이몽근 등 15명이다.



소년 뱃사공 윤성도,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살리다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은 강진과 석대들 인근 자울재 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관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쫓아 한반도 최남단까지 포위망을 좁혀왔다. 숨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관 일본군의 수색은 집요하고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500명의 동학농민군이 작은 섬 덕도에 숨었다. 관군이 수색망을 좁혀오자 동학농민군은 생사의 기로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때 소년 뱃사공 윤성도가 밤을 틈 타 돛배를 몰고 와 밤마다 동학농민군을 인근의 다른 섬으로 피신시켰다. 윤성도의 손자 윤병추씨(80)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목숨을 내걸고 쫓기던 동학농민군을 하루가 멀다 하고 배에 태워 인근섬으로 피신시켜 500여 동학농민군의 명을 보존시켰다.”고 증언했다.


회령성 아래 이청준 소설문학길. 회령성은 이인환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지였다.


일본군 토벌 일지를 통해서 본 동학농민군의 희생

1895년 1월 7일부터 14일까지, 장흥 “통행하는 남자를 모두 잡아 고문하고, 저항하면 옷에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의 편지)1895년 1월 7일, 전라도 장흥에 들어가 40~50호의 농가를 불태우고 동학농민군 10명을 죽였다.(이하,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구스노키 비요키치 상등병의 종군일지)


1895년 1월 8일, 전라도 장흥에서 착검 돌진(돌살)과 일제사격, 방화를 자행한 뒤 “대일본 만세!”를 삼창하게 했다.


1895년 1월 9일, 전라도 장흥에서 8명의 농민을 생포해 3명을 타살했고, 이어 도망치던 농민을 추격해서 48명을 타살하고 다친 사람 10명을 생포해 고문한 다음 소살했다.


1895년 1월 11일, 전라도 장흥 죽천 장터에서 18명을 죽였다. 대흥면 쪽으로 가다가 11명의 농민을 붙잡아 죽였고, 3명은 옷에 불을 붙여 바다 쪽에 빠져죽게 만들었다.


1895년 1월 11일, 전라도 장흥에서 통행자를 모조리 붙잡아 고문했고, 저항자는 옷에 불을 붙여 달아나면 총을 쏘아 죽였다. 그 광경을 보고 모두 웃었다. 죽청동 인근에선 12살 아이를 꾀어 동학군을 지목하게 한 다음 16명을 고문하고 8명을 총살하여 시신은 불태웠다.


1895년 1월 13일, 전라도 장흥 대흥면 산에서 동학농민군 수십 명을 잡아 죽였다. 길옆과 도랑에 버린 시신이 수십 명이었다. “순창읍의 한 주막에서 동학당 대괴수 전봉준을 포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895년 1월 14일, 전라도 장흥에서 동학농민군 17명을 체포해서 죽였다. 그날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최동이라는 17살 동학 지휘관을 체포했다. 1월 이래 죽인 농민들이 300명에 달했다.



장흥 동학의 맥

장흥 동학은 처음 강진 약산 어두리와 관산리로 전파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윤수하(尹秀夏), 윤숙하(尹琡夏), 권재국(權在局), 곽중(郭仲), 박명규(朴明圭), 박백규(朴白圭), 신명희(申明熙)씨 등 7 명의 동학교도가 배를 타고 장흥 회진을 거쳐 장흥 동학군에 합류하여 강진 대구면 수동리 윤세현의 부대에 합류했다. 장흥 강진 전투에서 활약한 윤숙하가 약산으로 귀향하여 동학의 맥을 이었다. 윤세현은 장흥 전투 관산 전투에 참여한 뒤 살아서 귀향했으나 관 일본군의 추적 때문에 고향을 떠나 장흥 대덕으로 피신하여 동학 재건에 나섰다. 아들 윤주갑(윤일출) 손자 윤건하 증손자 윤재라로 도맥을 이어오고 있다. 장흥 김재계와 완도 관산 신명희가 도맥을 이었으나, 현재 장흥교구는 김동철 김년홍으로 교구장을 이어오고 있다.


회령성은 이인환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무혈입성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 장흥지역 인물지


이방언(1838~1895) 

이름 민석(民錫) 자 자방(子邦) 인천 이 씨(仁川李氏)이니 장흥군 용산면 묵촌에서 출생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촌로들의 일화에 의하면 어느 해 장흥지방에 가뭄으로 흉년이 든 해에 장흥부사를 찾아가 감세를 진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전라감영으로 가서 감사에 진정하여 남상면의 결세를 감면했다고 한다.


일찍이 동학에 들어가 장흥접주로 1894년 3월 백산봉기에 이인환(李仁煥), 강봉수(姜琫秀), 강진(康津)의 김병태(金炳泰), 해남(海南)의 김도일(金道一), 영암(靈巖)의 신 성(申 聖)과 함께 참가했다. 특히 황룡(黃龍) 싸움의 유명한 ‘장태전법’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이방언은 장흥으로 돌아와 12월 4일 벽사역을 점령하고 5일에는 장흥부성으로 진격하여 저항하는 장흥부의 수성군을 격파했다. 7일에는 강진현과 강진병영을 점령하여 장흥 강진지구를 완전히 석권했다. 13일 관 일본군의 장흥 강진 지역 총공격으로 남문싸움에서 패하여 장흥부를 일본군에게 빼앗기자 다시 탈환하려고 15일 장흥부성을 포위하고 반격작전을 전개했으나 때마침 일본군 증원군이 도착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이방언은 죽천장으로 후퇴하여 17일 또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세간에서는 이방언을 관산 이대장(冠山 李大將) 혹은 남도장군이라고도 했다. 이방언은 12월 25일 이두황의 우선봉군에 피체되어 나주 일본군으로 넘겨져서 서울로 압송되어 다음해 3월 21일 뜻밖에 무죄 석방의 판결을 받았다. 일설에는 당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방언은 향리로 돌아와 회령면 신기 이의원(李義元)의 집에 잠거하다가 장흥부 수성군에 피체되어 1895년 4월 25일 아

들 성호(聖浩)와 함께 장흥 장대에서 최후를 마치니 나이 58세였다.


○ 이사경과 이호인 

이호인은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동생 호의 호신까지 입도시켰으며,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자 교도와 상의한 끝에 아들 이사경에게 접주 임무를 넘겨주었다. 접주가 된 이사경은 용반리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2월 4일 벽사전투, 5일 장녕성 전투, 7일 강진전투, 10일 강진병영전투 등에 참여했으며, 15일 장흥 석대 전투, 17일 옥산전투를 치른 뒤 용반리로 피신하여 근처 기역산에 몸을 숨겼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이사경에게 몰래 음식을 주면서 보호했으나 기역산 너머 유치대리에 사는 모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1월 벽사역에서 처형되었다.


■ 장흥 지역 동학 유적지


● 장흥, 석대(石臺) 뜰 전투지. 동학농민혁명기념탑(東學農民革命紀念塔)


● 장흥군 부산면, 흥룡단(興龍檀), 1901.


●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광서이십년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光緖二十年甲午東學亂守城將卒殉節碑), 1899.


● 장흥군 장흥읍 충열리, 벽사도찰방김후일원청사복성불망비(碧紗道察訪金侯日遠請師復城不忘碑), 1900.


● 이방언의 동학농민군 훈련터 : 용산면 도르뫼 들판


● 부용사 동학농민군 은신처  

석대뜰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이 관 일본군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겼다.


● 옥산 전투지 

관산읍에 위치한 옥산전투지는 죽천을 가운데 두고 솔치재 쪽 일본군과 동학농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 남송마을 동학농민군 묘지 : 옥산전투 때 희생된 수백 기의 무명 동학농민군이 묻혔다.


● 사창 동학농민군 집결지(장평면 용강리 2구 창몰마을) : 

1894년 10월 동학동학농민군 1천여 명이 집결했으며, 12월에는 남평 능주 동학농민군이 합류했다.


● 흑석장터 동학농민군 진영(현 장평면 봉림리 흑석마을) : 

“1894년 11월 7일, 동학농민군이 지난 그믐에 광주 남평 보성 장흥 금구 능주를 거쳐 들어와 진을 쳤다.


● 회진과 덕도의 회령성 : 이인환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무혈입성하여 화포와 조총 등 무기를 노획했다.


● 월정 전투지 

대덕읍과 유치면 사이 연지리에 동학농민군의 사령부가 있었다.


● 유치면 동학농민군 전투지 

조양리와 신풍리 일대에서 영암 쪽에서 넘어온 일본군에 맞서 동학농민군이 결사 항전했다.


● 푸조나무 동학농민군 집결터 

장흥읍 용산면 어산리에 위치한 푸조나무(느릅나무과, 천연기념물, 400년 수령) 밑에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여 훈련을 했다.


● 장대 처형터 

현 장흥서초등학교 운동장. 석대들에서 패한 동학농민군들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 석대들 전적지 

현 장흥읍 남외리. 이방언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관 일본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동학농민군 2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98호.


● 영회단(永懷壇) 

장흥읍 예양리, 장흥성 전투에서 전사한 박헌양 및 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당. 처음에는 장흥의 동문 안쪽에 있다가 뒷날 현재의 자리로 신축 이전했다. 목조비각 안에는 공적비가 있다.


● 벽사역 동학농민군 처형터 

현 원도리 일대와 장녕성(현 읍사무소에서 법원, 경찰서 일대)


◆ 천도교장흥교당(天道敎長興敎堂, 시도기념물 제218호, 장흥읍 충열교촌길 35) 

1906년 4월에 동학의 후예인 교구장 강봉수(姜琫秀) 등이 중심이 되어 천도교인에게 모금운동으로 지어졌다. 


<천도교장흥군교구역사〉와 교당 내부에 걸린〈 교구실기(敎區室記〉(1920년)를 통하여 당시 개축에는 전남의사원(全南議事員) 신명희(申明熙), 장흥교구장 김재계, 수령 강봉수, 윤세현 등이 주도했다는 사실과, 1917년(포덕오십육년정사(布德五十六年丁巳) 11월부터 한 달여에 걸쳐 2,300원(圓)을 모금하여 1918년 2월 15일에 건축을 시작하여 6개월만인 8월 26일 준공한 사실을 기록했다. 


장흥지방에 동학이 포교된 연대는 1891년 무렵이며 이인환, 이방언, 문남택 등이 동학에 입문했다.


◆ 장흥지역 향토사학자로 이의환 김동철 윤재라 씨 등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험의 빈곤 혹은 과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