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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02. 2018

경험의 빈곤 혹은 과잉

-영화 <버닝>을 보고 

[이 글은 개벽신문 75호(2018.6월호) '내 마음 열리는 곳'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 편집자 주] 


심규한 | 성요세상호문화고등학교 교사 


불타는 오월


불타는 날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남/북/미 간의 정세도 그랬지만, 남녘의 들판도 그랬다. 보리 익어 누런 5월의 들판, 보리 베기 끝낸 논 곳곳에 불을 질러 여기저기 연기 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있었다. 땅에서 하늘로 드리워진 거대한 커튼자락 같았다. 며칠이면 저곳을 다시 갈아 물을 넣고 모내기를 할 것이다.


남녘의 5월 보리들판에서 솟구쳐 오르는 연기기둥은 내겐 처음 보는 낯설고 강렬한 아름다움이었다. 오랫만에 찾은 극장에서 본 영화는 ‘버닝’이었다. 이창동 감독 영화답게 꼼꼼했다. 계급화된 사회의 부조리함을 응시하는 시선은 여전했고, 대사와 공간 등 하나하나가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화가 끝나자 ‘두 번째 쓰레기를 봤다’고 토로하며 밖으로 나가는 관객과 그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하기야 쓰레기와 보물이 온통 뒤섞여 버린 세상이니 쓰레기 속에서 보물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어려운 메타포에 대해 ‘쓰레기’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도 나름 소중할 터이다. 하지만 마블의 ‘어벤져스3’가 거뜬히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현실을 보면, 의미를 압도하는 자극의 시대를 실감한다. 우리가 자극에 압도되어 의미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이슬 내리는 공기가 벌써 매캐했다. 밤이 되어도 보릿짚 탄 냄새가 가득했다.


내게 이창동 감독은 특별하다. 유니크함은 최근 비난을 받고 있는 홍상수나 김기덕 감독을 따라갈 수 없지만, 영화의 탄탄함과 일관된 주제의식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는 탄탄한 소설가였다. 그의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읽었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다. 어둡고 질척거리는 80년대를 우리는 그렇게 통과했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그는 영화를 시작했다. ‘초록물고기’ 이후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로 이어지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경계 밖에 위태위태 걸쳐 있는 서민들의 고통과 사회의 이중성을 담고 있었다. 그의 영화는 영화치고는 드물게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꼼꼼하고 섬세했다. 하지만 내게 익숙했던 영화적 장면의 아름다움은 적게 느껴졌다. 오히려 스토리와 내면의 섬세한 짜임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버닝’을 보면서는 나는 그의 영화의 영화적 아름다움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즐겨 사용하는 흔들리는 미세한 빛의 상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경험의 빈곤, 혹은 과잉


‘버닝’은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다. 하지만 생각은 피로한 일이다. 최근 나도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어떤 것을 물고 늘어지질 못한다. 그래서 이 글도 단편적인 기록이 될 것 같다.


영화를 보며 내 머리를 맴돈 것은 ‘경험’이라는 말이었다. 파트타임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종수와 해미는 경험의 과잉으로 무기력하다. 하지만 놀이와 재미에 빠져 인생을 살아가는 강남 형 벤은 경험의 빈곤으로 권태롭다. 이 지나친 비대칭성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왜 한편은 지나치게 많은 경험으로 무기력하고, 왜 한편은 지나치게 빈곤한 경험으로 권태로운가? 일과 놀이 사이에 극단적으로 양분된 세계의 벽이 세워져 있다. 일에 빠져 허우적대야 사는 사람들과 놀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이다. 둘은 계급적 차이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일탈의 꿈이 있다. 해미의 돌아올 수 없는 일탈이 있고, 벤의 돌아갈 수 있는 일탈이 있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경험을 생존을 위한 현실의 노력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자연의 모든 개체는 살아가기 위해 노력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먹고 싸고 자고 입는 것 모두가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자연의 평등성이다. 하지만 문명은 계급을 만들고 계급은 불평등을 만들곤 한다. 문명 안에는 의식주의 기본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미 충족된 의식주를 고민할 필요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 둘의 경험은 문명 안에 구분된 일과 놀이처럼 상호 이해 불능이다. 같은 인간이지만 문명 안에서 계급이 분화되어 별종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한편은 인간 이하가 되고 다른 한편은 인간 이상이 된다. 마치 한편이 다른 한편을 동물원 동물을 구경하듯 농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계급이 낳은 경험의 불평등이 비도덕을 조장한다. 영화 속 벤의 해미에 대한 입장이 그러하듯.


위태한 여행, 혹은 위대한 여행


무기력과 권태는 계급의 산물이다. 나는 무기력이 많은 사람인가 아니면 권태가 많은 사람인가? 무기력과 권태는 자연의 평등을 잃어버린 잘못된 문명에 주어지는 형벌이 아닐까? 때문에 둘 다 무의미에 시달린다. 정당한 경험의 빈곤에서 오는 무의미다. 그래서 다시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찾는다. 재미 혹은 구원! 그것을 일탈이라고 해도 되고 여행이라고 해도 되리라. 나는 이러한 마음이 현대에 소비되고 있는 여행에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도피다. 경험의 과잉 내지 빈곤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현대의 여행은 더욱 그렇다. 해미와 벤은 여행자다. 그에 반해 종수는 탐색자다. 해미는 리틀헝거와 그레이트헝거의 비유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벤은 자연의 법칙을 빙자해 판단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라며 자기를 합리화한다. 둘은 경험의 빈곤을 돌파할 현실적 의지가 없다.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 종수는 문제의식에 괴로워한다. 종수는 현실의 부조리와 미스터리를 응시하며 밤과 낮 사이 새벽을 정처 없이 뛰어다닌다. 해미와 벤에게 여행은 불행하게도 일탈이 되어 버리지만, 종수는 소설을 통해 삶의 현실을 붙잡으려고 한다. 종수의 아버지는 말을 잃어버린 채 범죄자로 패배했지만, 종수는 자기만의 이야기로 현실에 대한 담론을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와 종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지만 종수는 자기만의 말과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종수는 이렇게 삶을 택한다. 종수가 결국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게 해서 자기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생성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수에게 인간은 평등하다. 벤의 자연주의가 약육강식의 자연주의라면 종수의 자연주의는 평등한 자연주의다.


나는 생산자와 생성자를 구분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생산이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한 자본의 상품 생산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의 의미를 잃지 않는 생성과 삶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이란 부조리한 경험의 세계를 뚫어 가며 의미의 맥락을 형성해 나가는 생명적 탈주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영화란 무엇인가? 사회적 협동으로 이뤄진 서사(이야기)다. 상품으로서 생산물인 동시에 생성물인 것이다.


삶의 의미


삶은 경험이고 삶의 기본은 살림살이에 있다. 살림살이는 구체적으로 의식주를 꾸려 가는 일이다. 의식주를 정당하고 건강하게 꾸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경험이고 삶이고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의미란 의식주의, 곧 삶의 정당함과 건강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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