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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5. 2018

동아시아 관점으로 해월읽기(21)

[개벽신문 제74호, 2018년 5월호] 빛살편지

김 재 형 | 인문운동가


천어(天語) 합리적인 이야기라면 어떤 말이든 한울님 말씀입니다
이심치심(以心治心) 한울 마음으로 감정을 다스립시다
이천식천(以天食天) 한울이 한울을 먹습니다 
양천주(養天主) 한울을 마음 안에서 키웁니다



22. 天語(천어)

1. 내 恒常 말할 때에 天語를 이야기 하였으나 天語가 어찌 따로 있으리오. 人語가 곧 天語이며 鳥聲도 亦是 侍天主의 聲이니라.

그러면 天語와 人語의 區別은 어디서 分別되는 것이냐하면, 天語는 大槪 降話로 나오는 말을 이름인데 降話는 사람의 私慾 과 感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公理와 天心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킴이니, 말이 理 에 合하고 道에 通한다 하면 어느 것이 天語 아님이 있겠느냐.



저는 항상 말할 때에 한울님 말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울님 말씀이 어찌 따로 있겠습니까?


사람의 말이 곧 한울님 말씀입니다.


새우는 소리도 한울님 모시는 시천주의 소리입니다.


그러면 한울님 말씀과 사람의 말은 어디서 구별되겠습니까?


한울님 말씀은 대개 위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들려오는 강화(降話)를 말하는 것입니다. 


강화는 사사로운 욕심과 감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진리와 한울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이 합리적이고 진리를 잘 설명하고 있으면 어느 것이 한울님 말씀 아닌 게 있겠습니까?



23. 以心治心(이심치심)

1. 내 恒常 天語와 人語의 區別을 말하였거니와, 以心治心도 또한 이 理致에서 생 긴것이라.
사람의 마음에 어찌 두 가지 뿌리가 있으리오.

다만 마음은 하나이지마는 그 用에 있어 하나는 以心이 되고 하나는 治心이 되나니, 以心은 天心이요 治心은 人心이니라.

譬컨데 同一한 火로되 그 用에 依하여 善惡이 생기고, 同一한 水로되 其用 에 依하여 利害가 다름과 같이, 同一한 心이로되 心이 理에 合하여 心和氣和가 되면 天心을 거느리게 되고, 心이 感情에 흐르면 狹隘窘迫하여 모든 惡德이 이로 생기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道닦는 者 以心으로써 恒常 治心을 抑制하여 御者가 勇馬를 善御 함과 같이 그 用에 宜하면, 禍轉하여 福이 되고 災變하여 祥瑞가 될 수 있나니라.



제가 늘 한울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구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도 이 이치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어찌 두가지 뿌리가 있겠습니까?


마음은 하나이지만 마음을 쓰는 데는 하나는 이심(以心)이 되고 하나는 치심(治心)이 됩니다.


이심은 한울님 마음이고, 치심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비유하면 같은 불이지만 쓰는데 따라 선악이 생기고, 같은 물이지만 쓰는 데 따라 이해가 다른 것처럼, 같은 마음이라도 마음이 이치에 맞고 마음이 서로 어우러져 기운이 조화롭게 되면 한울님 마음을 거느리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이 감정에 흐르면 너그럽지 못하고 좁아 몹시 군색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든 악한 행위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도 닦는 사람들은 이심으로써 항상 치심을 억제해야 합니다.


마차부리는 사람이 사나운 말을 잘 거느리듯이 마음을 올바르게 잘 쓰면 화가 바뀌어 복이 되고 재앙이 변하여 경사롭고 길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수련할 때에 한울님 말씀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직 진리에 이르지 못한 초보였습니다.


한울님 말씀과 사람 말의 구별은 오직 바름과 그름 두가지 뿐입니다.

른 마음으로 사심을 다스리면 한울님 말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기타 편)‘


민중 종교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만트라 수련 방법을 택합니다.


단순한 만트라를 늘 입에 달고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수련할 때만 쓰는 게 아니라 밭에 가서 김을 맬 때도, 먼 길을 걸어갈 때도 언제든 자유롭게 쓸 수 있습니다.


마음에 만트라 하나 새기고 살 수 있으면 나를 덮쳐오는 수많은 삶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고,
자기를 관리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수십만 농민군의 마음을 모으고 동질성을 확인하는 방법도 시천주 만트라 였을 겁니다.


만트라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평범한 민중들을 아주 짧은 시간에 깊은 믿음의 사람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은 그 사실 그대로 반대로 읽으면 단점이 됩니다.


짧은 시간에 깊은 믿음에 도달한 사람들 대부분 독선에 빠지고 폭력성을 가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금방 어떤 성취가 가능할 수 있을 거라는 조급함이 생깁니다. 

상황을 읽지 못하는 그런 불합리함을 변호하는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한울님 강화, 천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트라 수련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해월 선생님의 설교 태반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천어(天語)와 이심치심에서 하시는 말씀도 크게 봐서 해월 선생님 고뇌의 연속입니다.


어떤 이야기든 합리성을 잃으면 위험해 집니다.


24. 이천식천 (以天食天)

1. 내 恒常 말할 때에 物物天이요 事事天이라 하였나니, 萬若 이 理致를 是認한다면 物物이 다 以天食天아님이 없을지니, 以天食天은 어찌 생각하면 理에 相合치 않음과 같으나, 그러나 이것은 人心의 偏見으로 보는 말이요, 萬一 한울 全體로 본다하면 한울이 한울 全體을 키우기 爲하여 同質이 된 자는 相互扶助로써 서로 氣化를 이루게 하고, 異質이 된 者는 以天食天으로써 서로 氣化를 通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한 울은 一面에서 同質的氣化로 種屬을 養케하고 一面에서 異質的氣化로써 種屬과 種屬 의 連帶的 成長發展을 圖謀하는 것이니, 總히 말하면 以天食天은 곧 한울의 氣化作用 으로 볼 수 있는 데, 大神師께서 侍字를 解義할 때에 內有神靈이라 함은 한울을 이름 이요, 外有氣化라 함은 以天食天을 말한 것이니 至妙 한 天地의 妙法이 도무지 氣化에 있느니라.


제가 늘 자연 만물이 다 한울님이고, 무슨 일이든 하는 일마다 한울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物物天, 事事天)

만약 이 생각이 옳다면 모든 자연의 생명들이 다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이천식천( 以天食天) 아니겠습니까?


이천식천(以天食天)은 서로 맞지 않는 말인 것 같지만, 이것은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보는 것입니다.


한울을 전체로 보면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기 위해 같은 바탕에서는 서로 도와 기운의 조화를 이루고, 

다른 바탕에서는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으로써 서로 기운의 조화가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울은 한편으로는 동질적 기화로 종속을 기르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적 기화로 종속과 종속이 서로 연결되어 성장발전하게 합니다.


다시 모아서 말하면 이천식천(以天食天)은 한울의 기화작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운 스승님께서 모실 시(侍) 글자의 뜻에 대해서 말씀하신 ‘안에 신령이 있다함은 한울이고, 

밖에 기화가 있다함은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비한 천지의 묘법은 모두 기운이 만들어 내는 조화입니다.


이천식천,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다’는 개념은 

생태계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전 까지 서양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서양의 정신 세계는 선악이 명확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는 ‘나’이기에 ‘하느님의 자녀인 나를 공격하는 타자’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 개념의 연장에서 자연에 대해서도 인간에게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을 나누어 유익한 것에는 가치를 더하고, 무익한 것은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연에는 유익함과 무익함이 없고 서로 연결되어 

생태적 고리를 잇고 있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지금은 기후 재난, 동물과 식물종 멸종, 사막의 확대 등 각가지 재난으로 인해 

생태적 전일성을 누구나 삶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인간의 무지로 인해 끊어 졌던 생태적 고리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세계적인 과제입니다.


이천식천 (以天食天)은 오행의 상극(相剋)을 시적인 느낌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목화토금수의 오행은 상생과 상극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상생만 작용해도 위험하고 상극만 작용해도 위험합니다.


상생과 상극이 함께 작용해야 안정적인 변화와 발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늘 상생이 작용할 때 기쁨을 느끼고, 상극이 작용할 때는 고통스럽습니다.


상극은 내가 상대를 극해야 할 때도 있고, 상대가 나를 극할 때도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의식이 진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야 할 한울님의 일입니다. (物物天, 事事天)


이런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세상에 나쁜 일은 없습니다.


온 생명이 창조되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인류는 20세기를 통해 상극을 충분히 연습했습니다.


상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21세기에는 한발 더 진화할 수 있을 겁니다.


25. 양천주(養天主)

1. 한울을 養할 줄 아는 者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아나니라.
한울이 내 마음 속에 있 음이 마치 種子의 生命이 種子속에 있음과 같으니, 種子를 땅에 심어 그 生命을 養하 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道에 依하여 한울을 養하게 되는 것이라.

같은 사람으로도 한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이는 種子를 물속에 던져 그 生命을 滅亡케 함과 같아서, 그러한 사람에게는 終身토록 한울을 모르고 살 수 있나니, 오직 한울을 養한 자에게 한울이 있고 養치 않는 者에게는 한울이 없나니, 보지 않느냐, 種子를 심지 않은 者 누가 穀食을 얻는다고 하더냐.


한울을 마음 안에서 키울 수 있어야 한울을 모실 수 있습니다.


한울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씨앗의 생명이 종자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을 땅에 심어 생명을 기르는 것과 같이 사람도 진리로 마음에 모신 한울님을 키우게 됩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한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씨앗을 물속에 던져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한 평생 한울을 모르고 살 수 있습니다.


한울님을 마음 안에서 키운 사람에게는 한울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씨앗을 심지 않았는데 누가 곡식을 얻겠습니까?


해월 선생님의 글을 번역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번역하는 글이 

시처럼 읽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을 몇 번씩 반복해서 읽고 운율을 넣고 읽을 때 호흡을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지만 가지고 글이 시처럼 읽히는 게 아닙니다.


글 속에 시인의 감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해월 선생님은 진리를 설명할 때 시인의 감성으로 설명합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사용하고, 농민으로 살아왔던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안에 모신 한울님이 씨앗의 생명력과 같다는 이해도 

당신이 오랫동안 농민으로 살아왔기에 가능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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