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 성평등의 내재적 원류인가
[이 글은 개벽신문 75호 (2018.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본 사업의 목적은 ‘동학이 근대 성평등의 내재적 원류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울림 동학언니들은 동학의 정신과 역사도 공부하고 답사도 열심히 다녔지만, 국회도서관 등에서 자료도 찾아보고 관련 인터뷰도 진행했다.
‘성평등+동학’ 자료 찾기와 인터뷰
박길수 대표와의 인터뷰를 통해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두루 알게 되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리할 수 있었다. 1894년의 여성 동학인의 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려주셨기에 사업 방향을 여성 동학인을 찾는 것에서 근대 성평등의 내재적 원류로서의 동학 정신을 규명하는 쪽으로 바꾸게 되었다. 근대 여성 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신 분으로 수의당 주옥경(의암선생의 세 번째 부인), 향화(수원 기생, 3·1만세참여) 등에 대한 안내와 함께 1920년대 개벽사에서 출판된 잡지 [신여성] [별건곤]을 살펴볼 것을 권유하셨다.
지난 서울동학올레길 답사에서 소개된 묵암 이종일(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 쓴 비망록에서 동학이 여성해방에 직접적 원인이 된 것처럼 묘사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박길수 대표는 직접적 연결이 있다는 것보다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 즉 여성도 하늘이라는 것을 종지로 모시는 만큼 차별 없는 평등을 주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여성도 마찬가지라는 의미에서 여성해방의 내재적 힘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특히 박길수 대표는 1920년대를 우리나라 근대 사상사의 ‘제자백가 시대’라고 했다. 근대적 용어들이 범람하고 다양한 사상투쟁들이 전개됐다는 것이다. 특히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은 조선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여성해방도 사회주의 언어이다. 여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한 자유주의 여성운동은 좋은 혼처를 꿰차 신분 상승하고자 하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다시 남성의 부속물이 되고 자기 계급에 안주하려는 현모양처론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조선 여성의 8~90%를 차지하는 노농여성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사회적 의식을 갖게 하고 남성의 부속물이 아닌 여성 자신의 독립적 삶을 우선하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개벽사에서 나온 잡지들에서도 그런 담론들이 많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여성잡지 [신여성]에서 소춘 김기전은 진정한 여성해방은 교육의 혜택을 받은 ‘신여자’들이 겉모양 꾸미기나 좋은 혼처에 목메지 말고 ‘구여자’들의 삶을 선도하는 책임감을 갖는 데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던 소춘은 개벽사 잡지의 필진이면서 여성해방에 대해 가장 많이 얘기했던 남성 지식인이었다. 동학의 성평등 관념을 근대 식민지 상황에 맞는 여성해방이라는 담론으로 풀어서 설명한 것 같다.
‘성평등+동학’에 대한 갑론을박
‘성평등+동학’ 관련 자료를 찾다가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의 논문 <동학의 남녀평등사상>, 김경애 동덕여대 교수의 논문 <동학의 여성관에 대한 재고찰>을 알게 되었다. 박 교수는 동학에서의 남녀평등사상을 높게 평가했는데 그의 저서 [[한국여성 근대화의 역사적 맥락]]에서 “19세기 중반 동학은 여성을 평등한 인간으로 대해야 함을 주장/실천했는데 이는 한국 여성 근대화의 내재적 역량의 발로였다.”라고 했으며 여성 근대화의 내재적 역량을 역사적으로 밝힌 것이 본인의 한국여성사 연구에서 큰 보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동학에서의 남녀평등을 연구하고 그 중요성을 알려낸 선구적 여성 사학자라 할 수 있겠다.
1981년 발표된 위 논문 이후로 동학의 남녀평등사상에 대한 많은 논문이 있었는데, 그중 2003년도 발표된 김경애 교수의 논문은 동학을 근대적 성평등의 내재적 원류라고 보는 것을 반박하는 논문이었다. 유의미한 내용이어서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는 우선 박용옥 교수를 찾아가 인터뷰하기로 했다.
압구정역 근처에서 울림 동학언니들은 박교수를 만났다. 가장 궁금한 것은 동학을 여성사의 입장에서 최초로 연구하고 접근하게 된 계기였다. 그녀는 그 계기를 집안에서 남녀차별이 심했고 그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학자로서 국사편찬위원회 편찬사로서 많은 사료를 접할 수 있었는데 ‘여성’이 활동한 부분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동학 경전이 유교 사회에서 남녀평등을 말하고 있는 개혁적인 면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예로 동학의 ‘부화부순(夫和婦順)’을 들고 있는데 이는 ‘여필종부(女必從夫)’나 ‘부창부수(夫唱婦隨)’로 대표되는 종적 부부관계를 수평적 부부관계로 전환한 획기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는 경전의 말씀을 들어 여성을 내조 위치로부터 ‘스승’으로 끌어올린 것은 근대 여성운동 성취에 대한 기약이라는 극찬을 했다.
우리의 또 다른 궁금증은 근대 여성사에서 동학의 성평등 사상의 위치에 대한 것이었다. 경전에 있는 성평등의 내용이 근대까지 이어져 왔는지, 실제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것인데 그런 면에서는 부정적이지 않은가, 결국 가부장 한계 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유교적 여성관과 크게 차이가 없지 않으냐는 질문이었다.
박 교수는 이런 비판을 여성계로부터 많이 받은 것 같았다. 그동안 힘드셨는지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어떤 관점에서 동학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동학 경전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페미니즘 관점에서만 동학을 판단하여 나온 비판이라는 것이다. 동양적인 평등은 음양의 조화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개인으로서 여성에 대한 권리보다는 공동체 안의 조화적 측면에서 남녀를 바라보는 것이다. 음양은 개별로 존재할 수 없고 조화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개인’을 강조하면서 근대를 연 서양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동학의 남녀평등사상은 서구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19세기 후반 농촌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했다. 1890년대 이후 민중의 기반 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개화운동 가운데 여성해방 문제가 절규되고 여성교육 문제를 포함한 여성 제반 문제가 사회적인 큰 관심사로 대두되어 여성 개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여성 개화운동의 사상적 연원을 젊은 동학 지식인들은 동학사상에서 찾고 있었다. 그렇게 동학이 개화사상과 연관이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김경애 교수의 논문 <동학의 여성관에 대한 재고찰>은 제목에서와 같이 지금까지 있었던, 동학의 성평등 정신을 높이 평가해 왔던 지난 자료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어서 자연히 박 교수의 논문이 많이 인용되고 있었다. 직접 인터뷰를 통해 의견을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말한다.
동학이 차별적인 양반 질서를 부인하는 반봉건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남녀평등사상을 내포할 가능성을 지닌다고. 그리고 그것은 전통적인 유교의 여성관에 대한 내부로부터 생성된 변혁의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한국 여성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받아 왔다고. 특히 수운과 해월 두 선사는 여성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어 천대받았던 여성의 위치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수운과 해월은 유학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부부관계에서 주장한 가도화순론과 부화부순론은 [소학]의 내편 명륜의 내용과 같아 유교의 윤리관을 답습하고 있고, 수운 최제우는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으며, 해월 최시형은 여성의 본성이 편성(偏性)이기 때문에 남자가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여자가 남자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수도문>에서 시부모와 남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도 유교의 교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내칙도 전통 태교사상에 기반하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박용옥 교수가 논문에서 사용했던 ‘근대여성운동 성취에 대한 기약’, ‘여성해방의 당위성을 선구적으로 제기’ 등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동학은 성평등의 내재적 원류라고 말하다
울림의 동학언니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두 교수의 논문 모두 동학의 성평등에 대해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두 분 다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의 깊이나 전문성으로 볼 때 우리가 두 분의 논문 내용을 평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년 반 정도 동학을 공부해 온 실력(?)으로 안산의 동학언니들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2017년 11월에 우리는 사업보고회 겸 간담회를 진행했다. 토론자로 고은광순 대표를 초대했고 기꺼이 와 주셨다. 발제 내용이 곧 우리의 결론이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동학이 성평등의 내재적 원류이며 한국 여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발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두 논문에 대한 우리의 의견, 다른 하나는 아쉬운 점이다.
첫 번째 의견은 ‘그 시대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인데 현대 페미니즘, 그것도 서양에서 유입된 성평등에 익숙한 기준으로 조선시대 성평등을 운운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1980년 중반에서야 한국에서는 여성운동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 ‘여자와 그릇은 내돌리면 깨진다’ 등등 성차별적 속어들이 우리를 지배했다. 조선 말기는 오죽했겠는가. 두 선사가 성평등적 언행을 했고 이를 설파했다 하더라도 한 번에 서양적 성평등이 도래해야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안 될 것이다.
예컨대 김 교수의 논문에서 ‘편성(偏性)’에 대한 언급도 열등하다는 뜻이라기 보다 집 밖을 나가 돌아다닐 수 없는 여성들의 한계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 박 교수의 말이 옳다고 본다. 또한 부화부순이 이미 유교에서의 부창부수와 크게 다를바 없다고 했는데 ‘여성’을 ‘하늘’이라 명한 바탕 위에 화(和)를 논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두 번째 의견은 ‘동양적 평등’에 대해 좀 더 깊이 사유해 봐야 할 것이다. 서양 사조는 제국주의 침탈과 함께 왔고 마치 우월한 진리인 양 조선을 점령했다. ‘개인’이 공동체를 압도한 근대의 탄생은 그 모순을 드러내고 현대로 오면서 다시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개별화된 누군가로 인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존재에 선행한다’ 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회귀하고 있다. 음양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차고 넘치지 않는 조화로서 음양이 돌아가는 이치가 동양의 평등개념이라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현대에 와서야 깨우치는 것을 동양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물론 개인의 주체적 독립이 우선되지 않고는 공동체와 연대도 무의미하고 가부장의 왜곡된 유교 문화 아래서 아무리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해도 그것은 여성 희생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도 맞다.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 언어인 ‘성평등’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유교에서의 본질적인 음양 조화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김 교수가 지적한 대로 여성을 위해 지었다는 용담유사나 내수도문에 여성의 입장에서 겪는 삶의 고단함이나 사회적 차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계몽의 대상으로서만 여성이 위치 지어질 때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고 확장하여 진정한 평등에 이르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토론자인 고은광순 대표는 간담회 끝에 우리들이 너무 두 사람의 논문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논문이 그렇게 높은 비중으로 다룰 만큼 중요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동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동학언니들의 이야기를 써 보는 게 진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발제에 집중하면서 마치 시시비비를 가리는 느낌으로 앉아 있던 우리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접근이었다. 간담회 끝나고 우리는 진짜 우리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