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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17. 2018

동아시아 관점으로 해월읽기(23)

[개벽신문 제76호, 2018년 7월호] 빛살편지

김 재 형 | 인문운동가


십무천(十毋天) → 열 가지 거룩한 분노

임사실천십개조 (臨事實踐十個條) → 정성껏 지키어 어기지 말라

明心修德(명심수덕) → 마음을 닦으면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1. 무기천 (毋欺天)하라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2. 무만천 (毋慢天)하라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말라.
3. 무상천 (毋傷天)하라 한울님을 상하게 하지 말라.
4. 무난천 (毋亂天)하라 한울님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5. 무요천 (毋夭天)하라 한울님을 일찍 죽게 하지 말라.
6. 무오천 (毋汚天)하라 한울님을 더럽히지 말라.
7. 무뇌천 (毋餒天)하라 한울님을 주리게 하지 말라.
8. 무괴천 (毋壞天)하라 한울님을 허물어지게 하지 말라.
9. 무염천 (毋厭天)하라 한울님을 싫어하게 하지 말라.
10. 무굴천 (毋屈天)하라 한울님을 굴하게 하지 말라.



1. 착하게 살아가는 한울님을 속이지 말라.

2. 알바 노동자 한울님에게 거만하게 대하지 말라.

3. 비정규직 노동자 한울님이 부상당하게 하지 말라.

4. 청년 한울님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라.

5. 청소년 한울님들이 일찍 죽게 하지 말라.

6. 여성 한울님을 더럽히지 말라.

7. 가난한 한울님을 굶기지 말라.

8. 농민 한울님을 허물어지게 하지 말라.

9. 어린이 한울님이 싫어하는 것 하지 말라.

10. 이주민 한울님을 굴종시키지 말라.


십무천은 종교적 권유에 기반한 사회적 구호 성격의 글입니다. 십무천의 한울님들은 우리 사회에서 고통을 겪으며 삶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십무천은 인민의 삶을 고통에 빠뜨리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의미입니다.


동학 안에는 기본적으로 분노의 감정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화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입니다. 십무천의 종교적 분노는 언제든지 사회적 혁명으로 전환됩니다. 민중과 함께 하는 종교는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눈앞에서 굶고 있는 사람들을 봐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길을 잃고,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상황이 일상이 되었는데도 분노하지 않으면 이미 민중 종교의 기능을 잃은 상태입니다.


자비(慈悲)라는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慈)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한울님과 부모님의 사랑이지만, 비(悲)의 사랑은 분노를 배경에 깔고 있습니다. 분노하기 때문에 종교적 열정과 헌신이 생겨납니다.


완벽한 인격과 사랑의 화신처럼 살았던 해월 선생님이시지만 성자는 이런 거룩한 분노에서 대부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29. 임사실천십개조 (臨事實踐十個條)

1. 윤리를 밝히라. (明倫理)
2. 신의를 지키라. (守信義)
3. 업무에 부지런하라. (勤業務)
4.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臨事至公)
5. 빈궁한 사람을 서로 생각하라. (貧窮相恤)
6. 남녀를 엄하게 분별하라. (男女嚴別)
7. 예법을 중히 여기라. (重禮法)
8. 연원을 바르게 하라. (正淵源)
9. 진리를 익히고 연구하라. (講眞理)
10.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금하라. (禁淆雜)



임사실천십개조는 기독교의 십계명과 비슷합니다. 해월 선생님은 1891년 십개조를 공표하시면서 이 글 앞에 왜 지금 이런 규칙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때는 1860년 동학이 시작된 지 32년째입니다. 동학은 포덕 30년을 전후로 급속하게 조직이 성장합니다. 어쩌면 이 시기가 동학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해야 할지 모릅니다. 가장 전성기에 해월 선생님은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위기 의식은 해월 선생님 평생을 따라 다닌 무의식의 억압입니다.


‘세상이 점점 쇠미하고 운수가 막히매 도가 또한 희미하고 와전되어 도를 전하는 자 마음이 밝지 못하고 도를 닦는 자 또한 마음이 독실치 못하여 떠도는 주문과 망령된 말로써 난법난도를 감행하니 말이 이에 미치매 어찌 내 마음이 편할 수 있으랴. 이에 다음과 같은 임사실천십개조를 반포하노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껏 지키어 어기지 말라.’


<천도교백년약사>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동아시아인들은 오랫동안 좋을 때 위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임사실천십개조를 공표하는 위기 의식은 상당히 엄중한 데 비해서 내용은 추상적이고 마음을 다시 한 번 가다듬는 정도입니다.


동학 조직은 신분제 차별의 극복, 여성과 어린이의 지위 향상, 민주적 조직운영 이런 요소만 가지고도 당시의 시대에서 사회적 자기 과제 대부분을 다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동학은 근원적인 한계 중의 하나가 지하 비밀 조직이었습니다. 최고 지도자인 해월 선생님 자신이 36년간 도피 생활을 했고, 끝내 체포되어 사형당했습니다. 조직을 드러내놓고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바다와 강이 가로막히고, 비바람 눈보라 찬서리 내리고 얼굴 보며 만나기에는 너무 멀리 있어서 누군가는 반쯤 가다가 중단하고, 또 대다수는 한 웅큼의 정성이 부족하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명심수덕 편)



자연스럽게 동학 조직은 숨겨진 지도자들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읽고 스스로 주문 수련을 하며, 가끔씩 오는 동학 지도부의 지도지침을 통해 조직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율적이고 신뢰감 있는 조직 구성원의 집단이었지만 관리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거기다 조직이 급팽창하고 있었습니다. 조직의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번 해월 선생님이 간곡하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임사실천십개조는 자율조직의 규칙으로 정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징계 기능이 없고 스스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만큼 실행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임사실천십개조의 하나마나한 이야기인 윤리를 밝히라, 신의를 지키라. 업무에 부지런하라. 이런 권유에는 드러낼 수 없는 조직의 위기가 감지됩니다. 8번 연원을 바르게 하라는 이미 조직의 분열에 대한 위기 의식이 있습니다. 남접과 북접으로 흔히 분류되는 노선의 차이도 드러납니다.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 빈궁한 사람을 서로 생각하라, 남녀를 엄하게 분별하라. 예법을 중히 여기라. 이런 권유에서는 급성장하는 조직에서 생겨날 수 있는 여러 문제가 보입니다. 동학조직 안에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 가운데 성폭력 등의 일탈 행위도 공개되어 드러나기 시작했을 겁니다. 동학으로 인해 수난을 겪은 가족을 보호하는 문제도 공정한 관리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동학이 수행자와 신앙인이 분리되는 일반적인 종교 모델을 따랐다면 수행자 대상의 규칙과 일반 신자 대상의 규칙이 따로 있었을 것이고, 수행자들의 규칙은 이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했을 겁니다. 동학은 평범한 사람들의 종교, 부부가 함께 마음을 모으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기준에서는 높은 수준의 생활 규칙을 정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여성에 대해서는 해월 선생님께서 각별하게 권유하는 내수도문과 내칙을 따로 정했지만 그건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동학은 이 정도 내부 규칙만 가지고도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규칙의 의미도 있지만 성장하는 조직이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 의미가 더 큽니다. 그러나, 해월 선생님의 위기의식은 이후 대부분 현실이 됩니다. ‘도를 전하는 자 마음이 밝지 못하고, 도를 닦는 자 또한 마음이 독실치 못하여 떠도는 주문과 망령된 말로써 난법난도를 감행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9번과 10번의 권유, ‘진리를 익히고 연구하라.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금하라’는 사실 미래를 보고 한 이야기입니다.


동학은 동학 혁명 이전에 이미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혁명의 실패는그 속도를 더 가속화시키게 됩니다.



30. 明心修德(명심수덕)

1. 曰太古兮天皇氏 我先師自比之意也 山上有水 吾敎道統之淵源也 知此玄機眞理然後 有以知開闢之運無極之道矣
2. 嗟乎 樹無無根之樹 水無無源之水 物猶如是 玆曠前絶後五萬年初創之道運乎 以余不敏荷蒙薰陶傳鉢之恩 今三十有餘年 備嘗艱險屢經困厄 斯門正脈 庶幾回漓反淳 去駁就粹 而湖海風霜 形影 阻 或有半途之廢 亦多一 之虧 良庸慨然 盖吾道進行之誠否 唯在於內修道之善否 傳曰「 唯天無親克敬唯親」又曰「 刑于寡妻以御于家邦」然則克敬克誠於內修道 豈非吾道之大關鍵乎
3. 近日敎徒 警戒內政 尙矣勿論 修身行使 亦多輕慢怠惰 職此而入室姑捨問津無期寧不悚悶
4. 自非生知者 必資下學而上達 夫不敎而善上智也 敎而後善中智也 敎亦不善下愚也
5. 人之智愚不同 聖凡雖異 作之不已 愚可以爲智 凡可以入聖 務須明心修德 勿棄老之言 益勉涵養之心



태고의 한울님(天皇氏)은 우리 스승님께서 자신을 비유한 말입니다. 산 위의 물(山上有水)이 (큰 강의 발원지인 것처럼) 동학의 가르침은 진리 계보(道統)에서 근원입니다. 현묘한 진리에 대한 비유를 알아야 개벽, 무극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開闢之運 無極之道)


슬픈 일입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근원이 없는 강이 없듯이 만물은 모두 뿌리와 근원이 있습니다. 하물며 5만년을 이어갈 진리가 이제 시작되었는데(근원이 없겠습니까?) 어리석은 제가 스승께서 진리를 전해 받는 훈도전발의 은혜(薰陶傳鉢)를 입어 30여 년간 온갖 어려움과 거듭되는 고통과 재난을 겪으며 동학도 문의 정맥(正脈)을 이었습니다. 흐린 물이 맑아 깨끗해지고, 섞인 것을 버리고 순수한 것만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이에는 바다와 강이 가로막히고, 비바람 눈보라 찬서리 내리고 얼굴 보며 만나기에는 너무 멀리 있어서 누군가는 반쯤 가다가 중단하고, 또 대다수는 한 웅큼의 정성이 부족하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앞으로 동학이 나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여성 수도자들이 잘하고 못하는데 달렸습니다.

서경에는 ‘한울님은 누구를 특별히 더 사랑하지 않지만,
극진히 공경하는 사람만은 사랑하신다’ 라고 하셨고,
또 ‘부인을 통하여 가정과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 수도자의 지극한 정성 공경이
동학의 중요한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동학이 나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여성 수도자들이 잘하고 못하는데 달렸습니다(吾道進行之誠否 唯在於內修道之善否) 서경에는 ‘한울님은 누구를 특별히 더 사랑하지 않지만, 극진히 공경하는 사람만은 사랑하신다’ 라고 하셨고, 또 ‘부인을 통하여 가정과 나라를 다스린다(刑于寡妻以御于家邦)’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 수도자의 지극한 정성 공경이 동학의 중요한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동학교인들이 몸 수련을 제대로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솔선해서 가정을 다스리지도 못하고 가볍고 태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하면 동학의 방에 들어와 깊은 공부를 하는 것은 고사하고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됩니다. 어찌 두렵고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날 때부터 알고 온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워 높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下學而上達).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면 높은 수준인 상지(上智)이고, 가르친 다음에 잘하면 중간 수준인 중지(中智)이고, 가르쳤는데도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하우(下愚)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해서 같지 않고, 성인의 품성과 평범한 사람의 품성도 다르지만, 마음먹고 열심히 하면 어리석음이 지혜로움이 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마음을 닦고 밝히는 명심수덕에 더욱 힘쓰십시오. 늙은 사람 말이라도 버리지 말고, 마음을 키우는데 더욱 힘쓰시길 기원합니다.


해월 선생님은 마음의 의미를 가장 깊이 깨달은 한국인 중의 한분입니다. 그 마음의 힘을 사용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했을 겁니다. 사람은 쉽게 만나기 힘들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면 마음을 잘 지키기 힘듭니다. 그런 가운데 그나마 진리의 힘을 꾸준히 지켜내는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 동학혁명이라는 남성적 투쟁이 없었다면 동학은 여성 중심의 조직으로 안정적으로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학의 가르침은 여성적입니다. 밥과 생활을 깨달음의 중심에 두는 것 자체가 여성 영역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의도입니다. 만약 동학이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 정도의 수준으로만 자리잡았어도 지금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드러나는 생활협동조합 운동이나 GMO반대 운동, 재생 에너지 운동 등 여러 가지 중요한 사회 의제를 지원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을 겁니다. 한살림 생협 운동이 운동의 중요한 메시지를 해월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가져오는 것은 가장 한국적인 생활 협동 운동의 정신 세계를 해월 선생님이 찾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동학 자체는 한국 사회에서 종교로도 사회 운동으로도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서 이것을 좋다 나쁘다 쉽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동학 천도교라는 틀을 벗어나서 재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같이 있어서 사람이 마음 먹기에 따라 지혜롭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합니다. 두가지 다른 것이 같은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해월 선생님은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잠재우고 지혜로움을 쓰기 위해 노력한 사람일 뿐입니다. 마음먹고 열심히 하면 어리석음이 지혜로움이 될 수있고,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이 마음을 밝히고 닦는 명심수덕이었습니다. 

마음으로 세상을 움직였던 사람의 자기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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