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공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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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살던 시골 고향 마을 앞 '냇고랑'은 동네 고모숙모(아주머니)들의 빨래터이자 우리들의 물놀이장이었다. ['냇고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을 앞의 그 '시냇물은 폭이 3미터 남'서짓한 작은 개울이다.]
내 고향은 남해에서 '소문난' 해수욕장이 있는 곳이었지만 바다에서 하는 수영과, '냇고랑'에서 하는 물놀이는 나름대로 '노는 맛'이 달랐다.
'빨래터'보다 조금 위에서 물놀이를 하면 '고모숙모'들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문디 새끼들아, 더 위로 가서 놀아라!" 열명 안팎의 꼬맹이[문둥이의 자식들]들이 물놀이를 하다 보면 빨래를 해야 하는 물이 더럽혀지니 '좀 더 ' 위로 가서 놀라는 말이다.
우리가 '좀 더' 위로 올라가서 놀면 우리 '때문에' 구정물이 되었던 냇고랑 물은 빨래터에 이르를 때쯤 말갛게 맑아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자정작용'이라는 걸 후에 알았다. '물놀이뿐'이랴. 우리는 그 물에 '소변'도 보고, '충분히 아래쪽'에서는 또 그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기도 했다. '더러워서 안 마시는 놈!'도 있었으나 "야, 흘러가면서 깨끗해져서 괜찮아!"가 대세였다.
그런데, 유명 해수욕장이니만큼 '민박'을 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폐수'가 늘어나면서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냇고랑은 빨래와 물놀이는커녕 사람이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자정작용을 상실한 것이다. '자정작용'이란 생명작용/생명현상의 다른 표현이다. 자정작용의 기능/역량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죽었다"는 뜻은 아니되, "죽은 것과 진배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우리 사회, 우리 나라, 우리 세계는 자정작용을 상실했거나, 상실하기 직전이거나, ... 요행히, 그것을 회복해 나가는 중 ... 그럼에도 세계는 한동안 지금보다 더 지옥스로운 곳으로 추락해 가야 하는 ... 회복의 국면으로 돌아서기에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한 지경이 아닌가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2.
'사람이 모여 사는 것'은 아름답고 정의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이 "지나치게 되면" 반드시 독이 되어 오고, 악이 되어 돌아온다. 자본주의(산업혁명) 이래 이 세계의 문제를 한마디로 줄여 말해야 한다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아니겠는가.
지상에서의 화염지옥을 보여주는 이 폭염, '초열대야' 같은 말들도 인류의 문명이 '도시'를 기반으로 하면서 인구가 지나치게 집중하고, 부유함이 지나치게 되고, 편리함이 지나치게 되면서 나타난 결과에 불과하다. 과유불급의 독이다.
사람과 사람의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면질수록 사람과 사람의 영성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 이것이 현대 문명의 비극이다. 주변의 사람들은 '인인(仁人)'이 아니라 잠재적인 범죄자, 잠재적인 적으로 취급되며[무리 지은 '미투' 운동을 보라!], 신영복 선생 지옥으로 묘사했던 염천 속의 감옥살이처럼! 만나서 하하거리고 이야기할 때조차, "난 나, 넌 너"가 서로를 향한 에티켓이 되었으며, 그것을 미덕으로 칭송하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여성에게 출산과 육아에 따르는 모든(대부분의) '고난'을 짐지우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고, 무엇보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내 몸은 내 맘대로 한다"는 이데올로기로까지 나아가는 것에는 여간해서 동감이 되지 않는다.
3.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할 때, 이 세상의 문제를 한마디로 정의한 말씀이 '각자위심(各自爲心)'이다. 이 말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세태와 이기주의의 극성을 일컫는 말씀이다. 나는 이 말을 '생명의 일체성과 만물의 유기적 연관성'을 몰각(沒覺)하거나 나아가 적대시하면서, "난 나야! 내 맘대로 할 거야!"를 외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내가 맘대로 쓴 에너지가 오늘 나에게 폭염으로 돌아오듯이, 이 세상 만물은 무한의 사슬로 나와 이어져 있음을 망각하면, 오늘 우리가 겪는 폭염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동귀일체(同歸一體)'라는 말이다. 첫째로는 이 세상 만물이 '한울'이라는 동질성(一理)에서 나온 것들(萬殊)이라는 좋은 말이요[cf.莫非侍天主/物物天 事事天],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책임'을 말하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4.
한울님은 수운 선생을 만나자 말자,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만큼 수운 선생이 두려움에 가득차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것은, 짐짓 아닌 척 너스레를 떨지만, 두려움이 아닌가. 한울님으로부터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으려면, 담력을 키우는 것이 그 길은 아닐 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