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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06. 2018

유무상자 경제학과 모심의 혁명 2

-동학공부 26

유무상자 경제학과 모심의 혁명 2


1.

문재인 대통령이 제5차 남북정상회담을 조기 추진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디테일의 악마"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큰절!
제발 덕분에 그 점을 다시 한번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1.1.
'디테일의 악마성'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정의로운 전개를 가로막는, 적어도 자본주의 시대의 전개 이후, 좌절시키고, 희화하하는 바이러스의 근본적인 진원지다. 
1.2.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국가/민족/공동체가 마주한 관문의 이름도 '디테일의 악마문'이 아닌가 한다. 
1.3. 
정의와 불의 사이는 사실 1과 2처럼 '한끗'에 불과하다. 
그러나, 1과 2 사이에는 '1'만큼의 차이만 있을 수도 있지만,
"무한대"의 숫자가 놓여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0.1/0.01/0.001/0.0001/0.00001........................................
1.4.
그런데,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해 나가는 일들을/해 나가는 방식을 보면, 문재인 정부가 호기롭게 천명하였던 집권의 비전들이 우리 사회정치경제문화의 그 디테일의 악마성에 발목잡혀 가고 있는 것/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점점 커진다. 
[믿음천국! 불신지옥!!]

2.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란 끝이 없는 일이어서 개인은 물론 나라의힘으로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
이 말이 처음부터 이런 뜻으로 쓰였을까? 이 말이, 정말 '혼자 힘으로라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다고 나서는' 의인에게 그 주변사람들이 '충심(그렇게 하다가는 너만 거들난다.)'을 실어서 만류하는 말일까?
그보다는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도록 세뇌'하기 위한 말은 아닐까?
아니, 최초에는 선의로 쓰였다 하더라도, 실제 그 말이 쓰는 대부분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후자의 의미(가난한 자에게 책임 전가)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기정사실화된 불의/불법/부정의를 옹호하는 술어로 쓰여 왔던 것처럼...
최저임금제나 기본소득제에 대한 사보타주는 대체로 이러한 사고방식(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을 근거로 작동하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거기에 갖다 붙이는 온갖 역사적 논거들(유럽에서의 극빈자 구제 정책 역효과 사례 등)은 그 사보타주에 대한 후일담에 불과하다. 
2.1.
가난한 사람이 애초에 바랐던 것은 내 가난을 구제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당하게 부와 풍요를 추구할 기회를 박탈하지 말라고 또 균등하게 하라는 것이고 / 
부와 풍요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공정하게 해 달라는 것이고 / 내가 일한 만큼, 내 노력의 결실이 정의롭게 나에게 돌아오도록 해 달라는 것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기회의 균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이야기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였던 것은, 아니 환호라기보다 깜짝 놀랐던 것은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회(동아시아의 오랜 전통)가 꿈에도 잊지 못한 대동사회의 입구를 정확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지혜롭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2.2. 
문제는 우리가, 문재인 정부가 여전히 그러한 비전을 잊지 않고 있으며, 잃어버리지도 않았는지와
우리, 오늘의 민중, 시민들이 문재인 정부가 그러하다고 믿을 수 있느냐 못 믿느냐이다.

3.

내가 보기에 '가난을 구제하는 일'은 농사를 짓는 것과 같아서, 씨를 뿌리고 싹이 나기를 기다리고, 한여름의 땡볕을 견디며 피를 뽑고 물관리/가뭄 대비를 하며, 가을에 드디어 수확을 이루는 일과 같이 필연적으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게다가 한 해 농사만이 아니라, 종자개량과 같이 수년이 걸리는 일도 있고, 퇴비와 돌려짓기와 같은 정책적 고려도 해야 하는 일이다. 뿐만이랴, 이웃마을과의 거래나 약속 체계(무역 등)도 변수 아닌 상수로 작동하는 전방위적인 일이다. 이런 일들이 하루아침에 성과가 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인인지사[cf. 不忍人之心]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촛불의 촛농이 채 굳기도 전에, '가난한 살림' 문제를 들고 광장으로 몰려나오는 것은, 또다시 저들(!)의 계략(도 아니고 허허실실 전법)에 놀아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4.

정치적인 문제와 남북/북미 관계의 환호성 같은 순간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 최저임금과 경제... 문제가 폭염의 열기처럼 훅 우리 사회를 덮친다. 
이건 사실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로 대통령 자리가 결정되었다. 
헬로 동막골의 그 지상천국도 '멕이는 것'을 공정하게, 적시에 하는 것으로 가능했다.
그러니,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본게임인 것처럼 보인다.
4.1.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는 '문제'이지, 해답은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곧이어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었다"는 목소리가 터저나올 것이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다. 87년의 경우가 그러하고, 조선시대, 고려시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러하다. 이것은 한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필수적으로 안고 가야 하는 필생의 과제일 뿐이다. 
4.2. 
그러므로, 먹고사는 문제를 '문제'라고 명명하면, 우리의 인생, 인류의 역사가 온통 문제투성이, 문제로 시작해서 문제로 끝나.. 끝없이 이어지는 문제의 무덤에 갇히고 만다.
그것은 사실(事實)이고, 그렇기에 중요하며,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특히, 먹고사는 문제로 장난을 치고, 사기를 치고, 자기 욕심을 챙기는 사람/기업/집단/계급(이 없다고 헌법에는 씌어 있지만 금수저 흙수저가 계급이 아니고 무엇이랴!)에 대해서는 정의의 심판이 반드시 가해져야 하지만, 그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문제를 한 차원 높은 곳에서, 한 단계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4.3. 
먹고사는 것은 문제의 입구이자 출구이다. 
몸통은, 우리가 꿈을 가진, 한울님과 같은 거룩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꿈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자세, 그리고 그것에 대한 훈련의 기회를 확보하는 것이다. 
촛불혁명의 꿈은 진실과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 사회, 세계였다. 
물론, 내 삶의 먹고사는 문제와 괴리된 '진실과 정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 삶의 먹고사는 문제가 곧 진실과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문제로서의 우리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문제로서의 내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4.4. 
정치꾼이 정치인이되고, 정치인이 정치가가 되려면, 그 꿈을 제안하고 제시하고 제공해 주어야 한다.
정치인/정치가는 자기의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민중/시민으로 하여금 자기의 (원래 가지고 있는) 꿈을 찾아내고, 발견하고,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4.5. 
예컨대, TV에서도 기-승-전-먹방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꿈꾼 일, 좀 더 잘 꿈꾸는 일, 남의 꿈에서 배우는 일, 그것을 부러워하기보다 축하하고 찬송하며 그로부터 영감을 얻는 법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일이라면 시청자들이 기꺼이 그 값을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심성을, 사회적 분위기(제도)를 만드는 것(방송 공영화)도 TV 제작자들이 할 일이다.
4.6. 
오늘 정치(정당)을 한심스럽게/때로 분노하며 바라보곤 하는 까닭은 그들이 국민들과 더불어 꿈꾸기를 시도하기보다 눈앞에 어떻게 하면 먹을거리를 던져 주어 배고픔(으로부터 비롯된 분노와 짜증)을 달래 주(는 척 하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을 배고파 꿀꿀대는 돼지 취급하는 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먹고 사는 문제/그리고 나와 관련된 최우선 과제를 깃발에 써서 올리고, 
"각개전투" "각자도생" "각자위심"의 태세로 나아가는 것은 다시금 저들의 전략에 놀아나는 꼴이다. 
촛불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촛불혁명정부 - 문재인 정부를 향하여 촛불을 들 일이 아니다. 
어디를 향하여, 누구를 향하여, 무엇을 향하여, 왜 촛불을 들어야 하는가?

6. 
노회찬!
그는 자신의 꿈을 따라 난 길을 걷고 또 걸었던 사람이 아닌가?
이제는 우리가 꿈을 따라 걸어갈 차례가 아닌가?

추신. 
이것을 나는 '모심의 혁명'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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